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한 소녀는 한국의 방탄소년단이 좋았다. 방탄소년단 노래를 따라 부르고 싶어 소녀는 ‘한국 덕질(어떤 분야에 대해 깊이 파고드는 행위)’을 시작했다. 김치를 들고 환하게 웃으며 찍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는가 하면 짬뽕을 먹으며 ‘짬뽕은 역시 매워야 맛있다’고 글을 올리기도 했다. 소녀는 이런 ‘덕질’로 한국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한국에 패션모델과 예능 연예인으로 스카우트돼 스스로가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이 마법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러시아 엘프’ 안젤리나 다닐로바(22·사진)다. 다닐로바는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도 “이 모든 상황이 마법(magical)과도 같았다”며 활짝 웃었다.
‘성공한 덕후’는 한 가지 분야에 심취해 깊이 파고들다 보니 어느새 부와 명예가 따라온 사람을 일컫는 말인데 다닐로바의 경우가 딱 그렇다.
다닐로바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왔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인천공항에서 12시간 넘게 비행해야 갈 수 있는 먼 도시다. 그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6,812㎞ 떨어진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3년 전 우연히 본 유튜브 영상 때문이었다. 바로 K팝의 리액션 비디오(뮤직비디오 등을 본 사람들의 반응을 담은 영상)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K팝은 러시아에서 생소했지만 그의 취향에 꼭 들어맞았다고. 그의 플레이리스트는 곧 엑소·방탄소년단·빅뱅의 음악들로 가득 찼다.
“K팝은 그동안 제가 전혀 볼 수 없었던 음악이었습니다. 어떤 점이 좋았다고 콕 집어 설명하긴 어렵지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음은 확실하게 느꼈습니다. 당시 저는 한국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상태였는데도 한국어로 된 노랫말들이 귀엽고 예쁘다고 생각했습니다. 언어는 달라도 느낌은 통하니까요.”
그는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국 식당을 찾아 된장찌개 등 한식을 먹고 한국을 여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일상을 그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는데 이 사진이 우연히 한국의 블로그에 퍼지며 유명해졌다. ‘한국인과 결혼하고 싶은 러시아 엘프’라는 가짜 제목으로 올라온 된장찌개 ‘먹방’ 사진은 순식간에 SNS와 인터넷 언론에 퍼졌다.
이런 유명세를 바탕으로 다닐로바는 지난 2016년 한국의 연예기획사와 계약을 맺었다. 처음에는 걱정도 많았다. 어린 나이에 객지 생활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국을 좋아했지만 러시아와 언어도, 문화도 전혀 다른 한국에서 적응하기 어려웠다. 그런 그의 첫 출연작은 7개국 남녀가 새로 언어를 만들어 소통하는 프로그램인 ‘바벨 250’. 비슷한 배경을 가진 외국 출신 방송인들과 친해지며 그 역시 한국 생활에 연착륙할 수 있었다.
“알베르토, 파비앙 등 많은 외국인이 한국에서 방송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국적과 생김새는 달라도 한국 문화에 빠졌고 한국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요. 한국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그들이 같은 외국 출신 방송인으로서 자랑스럽기도 해요. 한국 연예계에서 활동하는 외국인이 늘어나고 이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 역시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점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사랑하는 한국 연예계의 문화적 다양성이 더 늘어나고 더 글로벌해지는 거니까요.”
그에 대해 빠지지 않고 따라오는 말이 있다. 외모를 치켜세우는 ‘엘프’ ‘여신’ ‘세젤예(세상에서 제일 예뻐)’ 등이 그것이다. 그가 SNS에 직접 ‘나 여신 아니야’라고 올렸지만 여전히 그를 설명하는 말 중 ‘여신’은 빠지지 않는다. 그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길을 걷는 그에게 대뜸 다가와서 “정말 예뻐요”라고 한마디 건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그때 정말 당황스러웠다”며 “러시아에서 전 평범한 외모인걸요”라고 소회를 밝혔다.
“세상에는 저보다 훨씬 예쁜 사람들이 많고 제 아름다움 역시 시간이 흐르면 사라집니다. 예쁘다는 말 대신 ‘네 덕분에 오늘 즐거웠어’라고 말할 때 가장 행복합니다. 힘들어하는 누군가를 도와주고 응원할 때도 행복합니다. 사람들이 미디어나 SNS 속 저를 보고 즐거움을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팬들에게 웃음을 전염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사실 다닐로바 역시 외모로 상처를 받은 적이 있다. 한국에서 예능 프로그램으로 얼굴을 알리기 전 러시아에서 프리랜서 모델로 활동하던 그는 한국 진출을 위해 모델 에이전시들에게 프로필 사진을 보냈다. 한국에서 일자리를 잡으면 좀 더 쉽게 한국과 러시아를 오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매번 퇴짜만 맞았다고 한다.
“사진을 보낼 때마다 뚱뚱하다, 엉덩이가 너무 크다,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당시 전 ‘한국에는 여행으로만 갈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지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제가 입은 옷이 예쁘게 보이고 사람들에게 팔리려면 제가 말라야 하니까요. 모델의 능력을 측정하는 데 있어 보디 사이즈가 하나의 파라미터인 셈이지요.”
다닐로바는 한국에 만연한 외모지상주의를 안타까워했다. 모델이나 연예인처럼 외모가 중요한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외모는 삶을 살아가는 데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는 “한국 사람들은 일반인들도 자신의 외모가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해 심한 중압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며 “충분히 매력 있는 사람들도 이 중압감 때문에 자신의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보였다”고 말했다.
“부담감을 내려놓고 자기 자신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세요.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말했기 때문에’라는 중압감에서 벗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그 누구도 타인에게 ‘어떻게 보여야 한다’고 강요할 수 없어요. 늘어난 몸무게 때문에 나빠진 건강을 되찾기 위해 운동을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넌 뚱뚱하니까 살 빼!’라고 말해서 운동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요즘 한국어를 ‘열공’ 중이다. 모국어인 러시아어를 비롯해 영어·세르비아어·이탈리아어까지 4개국어를 할 수 있지만 한국어 실력은 아직 부족하다. 특히 어려운 것은 문법이라고. 러시아어와 전혀 다른 어순을 가져 정말 어렵다고 고백했다. 그는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정말 바빠서 공부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며 “한국말을 하지 못할 때마다 ‘바보’가 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예능프로그램 촬영 과정에서 자신의 의견을 전달할 때도, 자신을 좋아하는 팬들과 소통할 때도 부족한 한국어 실력 때문에 쉽지 않았다고 아쉬워했다.
“쉴 때마다 한국어 노래를 듣고 한국 드라마·영화를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활동을 이어가려면 당연히 한국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워크미팅을 할 때도 최대한 열심히 듣고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바로 사전을 찾아 뜻을 확인하고 암기합니다. 한국의 친구들과 수시로 텍스트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많이 배우고 있어요.”
이런 정성이 통했을까. 다닐로바는 최근 한 영화의 주연 자리를 꿰찼다. 유명 영화 시리즈의 후속작이다. 그는 일정이 조율되는 대로 촬영에 들어가며 내년 말쯤 영화관에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노래에도 관심이 있다. 기타와 비슷한 소형 악기 우쿨렐레를 혼자서 배우기도 하고 여러 뮤직비디오에 여자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지금은 모델 일을 하고 있지만 제 삶을 테두리에 가두고 싶지는 않아요. 어떤 분야의 대가가 되는 것도 좋지만 크레이티브한 활동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멈추지 않고 무언가에 도전하는 것은 항상 흥분돼요. 연기에 도전한 것도, 우쿨렐레를 비롯한 음악을 배우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에요. 혁오밴드와 같은 노래를 하고 싶어요”
그는 러시아에서 한류의 달라진 위상을 실감한다고 밝혔다. 처음 한국에 갈 때만 해도 친구들은 K팝이 뭔지 잘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먼저 찾아 듣고 물어온다고. 그는 “앞으로 K팝은 더 인기를 끌 것”이라며 “세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K팝만의 특징이 있다”고 밝혔다. 많은 러시아 사람들이 한국 드라마를 감상하는 것은 덤이다. 친구들이 한국에 놀러 오면 부산이나 강릉·여수의 바닷가에 함께 가고 싶다는 그에게 한국은 연인과도 같았다.
“한국은 제 사랑을 더 크게 돌려줬습니다. 정말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새해를 맞아 연기와 노래 두 분야 모두에서 더 큰 성장을 이룬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한국어도 더 열심히 공부할 거예요. 지켜봐주세요. 사랑합니다.”
/우영탁기자 ta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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