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캄한 무대 위, 단출한 조명 아래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우두커니 앉았다. ‘라스트 카니발’의 선율이 무대를 채우자 그는 하얀 꽃에서 흰색 실크 손수건을 뽑아낸다. 한 바퀴씩 무대를 돌 때마다 남자는 아기였다가 소년이었다가 회사원이었다가 중년의 아버지, 그리고 노인이 된다. 기침을 하다 손수건을 바닥에 놓친 그가 다시 손수건을 집어들자 손에는 하얀 국화가 들려 있다. 한 사람의 일생을 시적으로 묘사한 이 작품을 보여준 이는 마술사 이은결, 아니 일루셔니스트 EG다.
지난 18~20일 서울 연지동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열린 ‘푼크툼(punctum)은 이은결이 4~5년 전부터 선보이기 시작한 ‘퍼포밍 일루션’ 신작으로 젊은 예술가들의 창작 실험을 지원하는 두산아트랩 선정작이다.
‘일루션(illusion)’은 마술적 상상력과 표현력을 극대화해 만든 새로운 표현방식. 마술이 일종의 정형화된 틀 속에서 마술사의 트릭을 보여주는 시각 예술이라면 퍼포밍 일루션은 예술가 EG의 작가주의를 담아 내는 사유의 그릇이다.
‘찌름(punctionem)’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비롯된 제목 ‘푼크툼(Punctum)’에서 유추 가능하듯, 공연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이미지나 가치가 비틀리는 순간을 보여준다. 옴니버스 형식으로 묶은 10여개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주제는 없지만 무언가를 찌르고 해체한다는 점에서 일부분 연결된다.
각 작품은 마술과 마임, 그림자극, 모션그래픽, 마리오네트 등을 넘나들며 이미지나 인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데 화려한 의상과 조명을 대신해 무대를 채우는 것은 그가 전하는 시적 언어다. 트릭을 최소화했지만 관객들은 트릭을 보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마술사 이은결로서 보여줬던 퍼포먼스가 관객들에게 또 다른 일루션을 만들어낸 탓이다. 그가 지향하는 것 역시 ‘마술적 표현을 가미한 예술’이다. 마술을 보는 관객은 마술사가 벌이는 속임수의 비밀을 캐내는데 열중하지만 일루션을 보는 관객은 그가 던진 시어들을 자신의 경험과 결합시키는데 열중한다. 사과 한 개를 잘게 잘라내 관객에게 골고루 먹여주는데도 사과의 양이 좀처럼 줄지 않는 장면에서 일부는 가톨릭의 성찬식이나 성경 속 오병이어의 기적을 떠올리고 무대 위에서 해체된 오징어가 뿜어낸 먹물이 물에 섞이는 장면에선 머리 속 ‘사유의 번짐’을 눈으로 확인하는 체험을 한다.
화려한 쇼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23년차 마술사로서 입지 굳은 그가 여백의 무대에 올라선 것은 크나큰 도전이다. 이번 무대를 통해 그는 새로운 장르를 한 발 한 발 정립해가고 있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줬다.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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