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차세대 초고속 통신망인 5세대(5G) 인프라를 국가 예산으로 설치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민간기업에 맡겼던 통신사업까지 국영화하는 전례 없는 조치를 취하는 한이 있더라도 중국발 통신안보 위협을 막아내겠다는 것이다.
미국 인터넷 매체 악시오스는 미 정부 내부문건을 입수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및 각 부처 소속 고위공직자들이 5G 인프라를 연방정부가 설치한 후 자국 통신기업에만 통신사업권을 부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29일 보도했다. 로이터통신도 미 정부 고위관계자가 “초기 단계이기는 하지만 논의가 오간 것은 사실”이라며 악시오스의 보도를 인정했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우리는 중국이 당신의 통화 내용을 엿듣지 못하도록 네트워크를 구축하기를 원한다”며 “안전한 통신망에는 악당들이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통신은 덧붙였다. 내부문건에는 지금처럼 통신사업자가 5G망을 설치하는 방안도 실렸지만 악시오스는 “이 대안은 중국의 안보 위협을 막아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예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보도했다.
미 언론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5G망 설치계획을 지난 1950년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의 고속도로 건설사업에 빗댔다. 미 전역에 5G망을 건설하는 사업은 7년간 2,750억달러(약 294조원)가 드는 대형 프로젝트인데다 사실상 민간 영역으로 들어간 통신사업을 다시 국유화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5G 사업에 투자해온 미 4대 통신업체인 AT&T·버라이즌·T모바일·스프린트가 공식 반응을 자제하고 있는 가운데 현지 언론들은 “대기업 중심으로 사업권이 돌아갈 것”이라며 시장왜곡 우려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이처럼 급진적인 정책을 거론하고 나선 것은 중국의 통신·사이버 위협이 ‘해킹’이라는 음지에서 ‘기업 활동’이라는 양지로 나오고 있다는 불안감 때문으로 분석된다. 최근 미 정치권에서는 중국 정부가 화웨이·ZTE 등 중국 통신기업과 손잡고 미국에서 통신기기들을 판매해 통화내역 등을 도감청할 것이라는 우려가 증폭되고 있다. 최근 AT&T가 미국에서 화웨이 스마트폰을 출시하려던 계획이 무산된 배경에도 미국 의회의 압력이 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14일 마이크 콘웨이 하원의원은 화웨이·ZTE가 생산한 통신장비를 정부 기관이 사용하지 않도록 강제하는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악시오스가 입수한 문건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는 화웨이·ZTE 등이 나아가 미국 통신망까지 장악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문건은 “5G망 구축을 추진하는 글로벌 업체는 퀄컴·삼성·화웨이·ZTE 등 소수이며, 특히 화웨이는 중국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세계 4G 이동통신(LTE) 통신망 시장에서 영향력을 빠르게 높이고 있다”면서 “비공식적 규제가 없다면 미국 5G 시장에도 화웨이·ZTE가 진출할 것이며 여타 기업의 시장 점유율이 더 떨어질 것임은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미국 시장이 중국 정부와 화웨이의 분명한 목표가 될 것”이라는 관측도 명시했다.
일각에서는 트럼프 행정부가 5G망 국유화를 시작으로 글로벌 통신 분야에서 중국 정부와 일전을 벌일 수 있다는 관측도 고개를 들고 있다. 미국 정부는 중국의 개발도상국 통신 인프라 투자가 일대일로(一帶一路, 육상·해상 실크로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다고 판단한다. 이에 대해 악시오스는 “미국 정부가 안전한 5G망 수출로 ‘민주주의 동맹’을 보호해 중국에 대항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변재현기자 humbleness@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