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공무원들을 만나보면 한마디로 죽을 맛이라며 울상을 짓는 이들이 많다. 새해 들어 업무 자체가 많아진데다 상부의 지시대로 애써 정책을 마련해도 잘 먹혀들어가지 않으니 일할 맛이 안 난다는 것이다. 하긴 똑똑하다는 공무원들이 전 정권에서 만든 정책보고서를 ‘표지 갈이’나 일삼는 개혁의 대상으로 치도곤을 당하고 있으니 딱할 만하다. 그들이 분풀이하듯 산하기관에 제대로 하지 않으면 ‘감옥에 갈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도 일견 이해할 만한 일이다. 공직사회에서 정권이 바뀌어도 달라진 게 없어 답답하다는 하소연이 터져 나오는 이유다.
해가 바뀌면서 정권의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다. 청와대에서는 연일 호통소리가 들려오고 정책 혼선을 질타하는 목소리도 높다. 청와대 참모들이 지지율 하락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따지고 보면 통일이나 한민족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대는 이들로서는 남북 단일팀이 한반도기를 들고 입장하는 데 반발하는 요즘 젊은이들의 이기적(?) 정서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보수와 진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젖어 국민 누구나 통일과 평화, 역사의 진보라는 거대 담론과 철학에 공감하리라는 것이야말로 나만 옳다는 독선과 오만일 수 있다. 세상이 바뀌면서 과거에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것들이 점점 힘을 잃어가고 무조건 적용되기 어려운 시대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는 얘기다. 이런 터에 잘못된 통일교육이나 언론을 탓해서는 올바른 해법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최근 논란을 빚고 있는 최저임금도 마찬가지다. 여권에서는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에 따른 부작용이 커지는데도 실체 없는 악성 마타도어라거나 아파트 주민들의 도덕적 자질론까지 거론하고 있다. 청와대는 관료를 탓하고 관료는 민간을 탓하는 식으로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행태는 본질을 외면한 것이 아닌지 되짚어봐야 한다.
흔히 시장이냐 국가냐는 판단이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기준이라고 한다. 큰 정부와 작은 정부를 비롯해 감세·민영화·규제·노동유연화·개방화 등이 대표적인 척도로 거론된다. 이런 틀에서 과거 진보정권의 실패를 지목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글로벌 경계선이 무너지고 이해 당사자들의 관계가 복잡해진 상황에서 과거의 획일적인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시장 개방폭을 조금 늘렸다거나 공기업 몇 곳을 민영화했다고 해서 과거처럼 배신이니 일탈이니 부르짖으며 날을 세우기에는 세상이 너무 앞서 가는 셈이다.
프랑스의 첫 좌파 대통령인 프랑수아 미테랑은 자본주의와의 단절을 외치며 당선됐지만 실제로는 경제 자유화를 앞장서 실행에 옮겼다. 그는 좌파의 모든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고 실제로 ‘삶을 변화시킨다’는 슬로건을 앞세워 좌파에 도움되지 않는 정책도 과감히 도입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진영논리에 사로잡히지 않고 국민 눈높이에 맞춰 필요한 것은 과감히 수용하고 타협하는 발상의 전환이 절실한 때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자면 생산성과 효율성을 고민하고 피부에 와 닿는 구체적인 정책대안이 뒤따라야 한다. 현장과의 적극적인 소통과 공감이 없다면 보수층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꼰대라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이제는 ‘내가 틀렸을지 모른다’며 끊임없이 자문하고 다양성과 분산화라는 시대정신을 직시해야 할 때다.
구글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렸던 스티브 예그는 얼마 전 사표를 던지면서 “어떤 회사든 극적인 성공을 이루면 운명적으로 비극적인 결과를 맞게 된다”고 꼬집었다. 구글이 기득권에 매달리는 보수주의와 오만함에 빠져 꼰대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최악의 문제점은 모든 초점을 고객에 맞춘다는 슬로건이 단지 입바른 소리에 불과했다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너도나도 심지어 ‘혁신의 아이콘’이라는 구글도 꼰대로 몰리는 세상이다. 다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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