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때가 되면 다시 듣고 싶은 추억의 노래들이 몇 곡 있다. 내가 대학 다닐 때 유명했던 소설가 조해일이 작사를 하고 듀엣 해바라기의 이주호가 곡을 붙인 ‘갈 수 없는 나라’도 그런 노래들 중 하나다.
TV에서 이 노래를 만난다는 것은 행운에 가깝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라기보다 노래를 부른 해바라기에게는 ‘행복을 주는 사람’ ‘모두가 사랑이에요’ ‘어서 말을 해’ ‘내 마음의 보석상자’ 등 불멸의 히트곡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검색해보니 오리지널 ‘갈 수 없는 나라’는 지난 1985년 초에 발표한 해바라기 2집에 수록돼 있다. 그런데 인터넷에 떠 있는 가사를 훑어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30년 이상 ‘정의 없는 마음에 몸 바쳐 쓰러진 너’라고 듣고 또 그렇게 불렀는데 그 어디에도 ‘정의’라는 가사는 없고 그 자리에 ‘정’이라는 글자만 동그마니 남아 있는 것이다. 내가 그리워했던 노래 속의 ‘너’는 정의 없는 마음에 몸 바쳐 쓰러진 게 아니라 정(情)이 없는 마음에 몸 바쳐 쓰러진 거였다.
허탈감이 잠시 머물렀고 깨달음은 오래 나를 휘감았다. 아주 긴 시간 동안 나는 듣고 싶은 대로만 들었던 것이다. 귀가 그러했으니 눈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몽상가의 생각은 원래 꼬리가 길다. 정의냐, 정(情)이냐. 문득 정의의 이름으로 정의가 살아난 적이 얼마나 됐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정의’라고 써놓고 실제로는 ‘정’의 크기에 따라 사람들을 분류했던 적은 없었는지 반성도 해본다. 정의와 정의감은 분명 다를 텐데 그 둘을 혼동한 적은 없었는지도 돌아보게 된다.
지난해는 유난히 따끔한 말들이 많이 떠돌았다. 뉴스를 보다가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배우 김영철이 내뱉은 명대사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가 오버랩되는 순간도 많았다. 반성은 없고 반발만 무성하게 만드는 세상은 결국 보복의 악순환을 가져올 것이다. 지금 핏발 선 눈으로 야단치는 그 사람이 다시 그 자리에서 눈물 흘리지 않으려면 정의감과 함께 인간적인 ‘정’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세상을 이기는 게 세월이라는 것을 어느 지점에서 알아챈 덕분이다.
세월 앞에서 당당해지기란 웬만해서 쉽지 않다. 연말 연초는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시기다. 한때 ‘희망고문’이라는 말이 전염병처럼 돌았던 적이 있다. 그러나 희망은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할 뿐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유효하다. 정의도 정(情)도 마찬가지다. 다만 정의만 소리를 내고 정은 종적을 감춘다면 우리가 꿈꾸는 나라는 영원히 갈 수 없는 나라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조금씩 든다.
세상이 추워질수록 사랑의 온도를 조금 높이는 것은 따끔한 말 한마디보다 따뜻한 말 한마디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따라 맑은 햇빛과 나무와 풀과 꽃들, 그리고 사랑과 평화가 있는 나라가 그립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