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 등 북한의 고위급 대표단을 태운 전용기는 9일 예정보다 17분 늦은 오후1시47분에 인천국제공항에 착륙했다.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 위원장은 남관표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과 함께 나오고 이어 3~4m 뒤로 김여정도 검은색 롱코트에 작은 가방을 어깨에 메고 앵클부츠를 신은 채 모습을 드러냈다.
◇김여정, 첫마디는 “감사합니다”=마중 나온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김 위원장에게 “환영합니다”라고 말했고 김 위원장은 “고맙습니다”라고 답했다. 김여정은 시종일관 여유 있는 미소를 띠며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어 고위급 대표단과 우리 측 영접 인사들은 인천공항 내 귀빈실에서 20여분간 환담을 나눴다. 김 부부장과 김 위원장은 서로에게 “먼저 앉으시라”며 자리를 권했다.
첫 만남에서는 주로 김 위원장이 말을 했다. 그는 “지금 대기 온도가 몇 도나 되느냐”고 물은 후 답변을 듣자 “평양 기온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조 장관은 “요 며칠 전까지는 좀 추웠지만 북측에서 귀한 손님이 온다고 하니 날씨도 거기 맞춰서 이렇게 따뜻하게 변한 것 같다”고 얘기했다. 이에 김 위원장은 “예전에도 우리는 동양 예의지국으로 알려진 나라”라며 “이것도 우리 민족의 긍지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고 답했다. 김 위원장은 “담배 한대 피울까”라며 “그림만 봐도 누가 남측 인사고 누가 북측에서 온 손님인가 하는 것을 잘 알겠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이어 북한 고위급 대표단은 KTX를 타고 바로 평창으로 이동해 문재인 대통령이 주최한 리셉션과 개막식에 참석했다. KTX 진부역에 내려서 취재진이 “기분이 어떠신가”라는 질문에 김여정은 옅은 미소를 유지한 채 답을 하진 않았다.
◇김여정 보내 대북제재 한미 연합전선 허무는 노림수=이번 고위급 대표단에 김여정이 포함된 것은 평창에서 전 세계의 이목을 북한에 집중시키고 체제선전을 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김일성 일가의 첫 한국 방문으로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남한과 밀착되는 모습을 보이며 미국의 의중을 떠보고 한미를 떨어뜨리려는 의도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 재무부 독자제재 대상인 김여정을 보내 대북제재와 관련한 한미 전선을 허무는 효과도 노렸을 수 있다.
◇10일 문 대통령과 오찬…평양 초청할까=문 대통령은 10일 오전 11시 청와대 본관에서 북측 고위급대표단을 접견하고 함께 오찬을 한다. 이 자리에는 김여정 뿐 아니라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최휘 국가체육지도위원회 위원장,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이 참석한다. 우리 측에서도 청와대의 정의용 안보실장·임종석 비서실장과 조명균 통일부 장관 등 주요 인사들이 함께한다.
CNN은 9일 복수의 외교소식통을 인용해 김여정이 오찬에서 문 대통령을 평양으로 초대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도했다. 소식통은 “평양 방문 날짜가 광복절인 8월15일로 잡힐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김여정이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친서를 가져왔을 확률이 높으며 초청 내용이 담길 가능성이 제기된다. 서울경제신문 펠로(자문단)인 남성욱 고려대 교수도 “날이 따뜻해질 때 문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달라는 요청이 있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청와대는 아직 신중한 분위기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너무 빠르게 남북이 밀착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미국이 기분이 상할 수 있고 북한에도 좋을 것이 없다”며 북측이 실제 초청장을 내밀지는 예단하기 어렵다고 말을 아꼈다. 이 경우 남북정상간 직접 대면을 서두르기보단 특사가 오가는 셔틀외교 형태가 한동안 이어질 수도 있다.
남북 간에는 이처럼 어떤 형태로든 대화의 끈을 이어가려는 시도가 이어질 것으로 보이지만 문제는 북·미간 소통 여부다.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9일 김영남 위원장이 참석한 평창올림픽 개막식 리셉션에 착석도 않은 채 잠시 얼굴만 비치고 갈 정도로 미국측은 현재 북측과의 접촉은 커녕 동선이 겹치는 것마저도 극도로 꺼리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대화의 조건에 대한 양측 견해 차이와 불신 때문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현재 미국은 ‘비핵화를 전제로 한 대화’는 하겠다는 입장이지만 북한은 ‘비핵화’를 뺀 대화를 하겠다는 생각”이라고 평가했다./이태규기자 classic@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