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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터리] 마음이 움직이는 그 순간

주철환 서울문화재단 대표





10년 넘게 살고 있는 아파트 주변에는 미술관도 있고 영화관도 있고 박물관도 있다. 평소에는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고 지내다가 어느 날 건물 앞에 걸린 간판 하나에 눈길이 머물 때가 있다. 책 제목처럼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그것으로 인해 고여 있던 마음의 샘물도 출렁인다. 관심에서 관찰로, 관찰에서 관계로 이동하는 순간이다.

오래전 대학에서 ‘방송분석’이라는 수업을 한 적이 있다. 중간고사를 마치고 학생들과 강원 고성으로 1박2일 여행을 갔다. 전세 버스 안에서 미니 백일장을 열었다. 학생들에게 여행의 기대감을 몇 개의 단어들로 표현해보라고 했는데 군대에서 갓 제대한 복학생의 글이 장원으로 뽑혔다. ‘우리 마음이 움직이는 그 순간’. 결혼식 때 내가 주례를 선 그 학생은 졸업 후 드라마 프로듀서(PD)가 됐다. 언젠가 그가 연출하는 드라마 기획안에 ‘우리 마음이 움직이는 그 순간’이라는 열두 글자가 숨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살다 보면 예고 없이 보너스를 받는 행운이 가끔 찾아온다. 영화 ‘파리로 가는 길’은 극장 외벽에 간판이 걸릴 때부터 마음이 끌렸다. 바쁘다는 핑계로 번번이 기회를 놓치다가 ‘뜻밖의 사람들’로부터 ‘마음이 움직이는 시간’을 선물 받게 됐다(시사회에 초대받은 것 아니냐고 물으시겠지만 그건 아니다).

문화재단 대표로 일 년에 여러 차례 서울시의회에 가야 할 일이 생긴다. 갈 때마다 조마조마하다. 마음의 준비를 아무리 해도 예상치 못한 기습 질문에 현기증 나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날도 긴장감으로 무장하고 시의회에 출석했다.



평상시에는 아무리 일찍 끝나도 저녁 시간까지는 머물러야 하는 자리다. 그런데 그날은 좀 달랐다. 평소 열변을 토하기로 유명한 몇몇 의원들에게 사회자가 미리 당부를 하는 거다. “오늘은 조금 짧게 부탁드립니다.” 솔깃했지만 그래도 설마 했다. 그런데 정말 그날은 질의응답이 예상외로 순조롭게 끝났다. 마음으로부터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러니까 앞서 말한 뜻밖의 사람들은 바로 시의원들이다.

영화관을 향해 가는 길은 가뿐했다. 하지만 그날 내가 선택한 ‘파리로 가는 길’은 그리 가벼운 여정이 아니었다. 80세가 넘은 여성 감독 엘리너 코폴라는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뭐가 그렇게 바쁜가.” ‘성공’한 영화제작자인 마이클(앨릭 볼드윈)과 앤(다이앤 레인)은 그야말로 바쁘게 사는 부부다. 칸에서 만난 자크(아르노 비아르)는 그들과 다르다. 그는 수없이 묻는 앤의 질문인 “파리, 오늘 안에 갈 수 있나요”에 느긋하게 답변한다. “걱정 마요. 파리는 도망 안 가요(Paris can wait).”

우리는 왜 이렇게 서두를까. 영화는 말한다. 사라진 줄 알았던 모든 것은 다 살아 있는 것들이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언젠가 우리에게는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할 때가 온다. 사람들은 ‘성공’을 향해 허겁지겁 달려가지만 성공을 마지막 목적지로 설정하면 평생 성공을 몇 번 못한다. 마음이 움직이면 하루에도 여러 번 성공할 수 있다. 민주주의로 가는 길, 문화로 가는 길, 예술로 가는 길도 마찬가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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