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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워치]예술선 '인권' 부르짖더니…추한 행동에 치를 떨다

[문화예술-종교계 성추문 파문 충격 큰 이유]

제왕적 권력으로 단원·지망생들 꿈 짓밟아

'먹이사슬' 물고 물리는 권력구조 민낯도 노출

"남성 중심 문화 개선·제도 정비 병행해야"

성추행 파문을 일으킨 연극연출가 이윤택이 지난 19일 서울 종로구 30스튜디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머리를 숙이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988년 부산 가마골소극장에서 초연한 연극 ‘시민 K’. 이 작품은 신군부의 폭거로 폐간된 언론사 기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정통성 없는 권력의 추악한 실상을 낱낱이 고발했다. 모던한 스타일과 치열한 사회비판 의식을 함께 갖춘 ‘시민 K’는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뜨거운 호평을 받으며 그해 연극상을 휩쓸었다. 이 작품을 연출하면서 일약 연극계의 스타로 부상한 이가 이윤택이다. 당시 어두운 권력의 그늘에서 고뇌하는 시민 K의 입을 빌려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그는 대중에게 의인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윤택은 위선자였다. 그동안 그는 숱한 악행을 저질러왔고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끔찍한 성폭행 추문의 가해자로 지목됐다. 군부독재에 날을 세웠던 이윤택이 실상은 수십년 동안 폭압적인 사이비 교주처럼 군림해왔다는 사실이 줄줄이 폭로되면서 대중은 충격에 휩싸였다.

문화계에서 처음으로 성 추문 사실이 불거진 고은 시인 역시 군사정권에 맞서는 결연한 저항정신을 작품으로 승화했을 뿐 아니라 10년 넘게 세계 최고 권위의 노벨상 후보로 거론돼왔다는 점에서 문단 안팎의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성 추문 폭로는 종교계까지 번졌다. 23일 천주교 수원교구에 따르면 성폭력 의혹이 제기된 한모 신부가 일시적으로 직무가 정지됐다. 한 신부는 2011년 아프리카 남수단 선교 봉사활동 당시 여성 신도를 성폭행하려 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지현 검사가 촉발하고 문화예술계에서 불붙은 ‘미투(me too)’ 열풍. 진원지는 법조계였지만 지금은 문단과 영화계·연극계를 넘어 종교계까지 연일 새로운 의혹이 터져 나오고 있다. 인물을 바꿔가며 봇물처럼 쏟아지는 추문에 대중의 분노도 활활 타오르는 양상이다.

전문가들은 문화예술인의 위선에 대중이 더욱 분노하고 있다고 말한다. 현택수 한국사회문제연구원장은 “일반인들은 원래 검찰·정치권의 도덕성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불신이 크지 않느냐”며 “이 때문에 대중은 검사나 정치인 같은 세속적 엘리트의 일탈보다 예술가의 추문에 더 큰 충격을 느끼는 듯하다”고 진단했다. 현 원장은 “작품이나 사회적 발언을 통해 인권의 소중함과 같은 아름다운 가치를 부르짖었던 예술가들의 실상을 알게 되면서 그들의 위선에 치를 떨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문화예술계의 성범죄 관행을 부추긴 가장 큰 이유는 오랜 세월 굳어진 비틀린 위계구조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매우 취약한 위치에 있는 연극 단원이나 작가 지망생들로서는 그 세계에서 추방되지 않고 꿈을 실현하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권력자의 부당한 요구를 거부하기가 쉽지 않은 구조라는 분석이다. 현 원장은 “이윤택씨가 ‘안마를 받고 기(氣)를 얻지 않으면 제대로 공연하기 힘들다’고 했다는 얘기를 듣고 매우 당혹스러웠다”며 “법과 제도를 적폐처럼 여기면서 ‘예술’을 빙자해 온갖 추문을 저지른 문화예술계 권력자들의 실상이 이번에 폭로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비틀린 위계구조는 문화계에 ‘물고 물리는’ 복잡한 권력관계를 만들었다는 해석도 있다. 이윤택의 성 추문을 고발하자마자 또 다른 여자 조연출을 폭행한 가해자로 지목된 배우 오동식의 사례 역시 이런 복잡한 권력구조의 민낯을 드러낸 것이라는 분석이다. 한 연극계 관계자는 “물리고 물리는 ‘먹이사슬’이나 다름없는 위계구조에서는 오동식처럼 피해자와 가해자의 얼굴을 동시에 지닌 사례가 무수히 많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성범죄가 문화예술계에서 꼬리를 물고 터지는 보다 근원적인 이유는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남성우월적 사고방식과 성추행에 대한 남성들의 불감증에서 찾아야 한다. 15년차 검사로 사회적으로 막강한 힘을 가진 서 검사도 피해 사실을 고백하며 ‘미투’ 운동을 촉발했을 정도이고 남성중심 문화에서 한두 번쯤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다고 토로하는 여성들도 쉽게 볼 수 있다. 실제로 결혼정보회사인 비에나래가 최근 미혼남녀 47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당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답한 여성의 비율은 8.0%에 불과했다. 미혼여성의 92%가 최소한 한 번 이상은 성추행 등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털어놓은 셈이다.

이제 우리 사회 전체가 뼈아픈 성찰을 시작할 때다. 최근 문화예술계를 넘어 사회 여러 분야에서 막혔던 둑이 터지듯 쏟아진 성범죄 사태를 계기로 우리 사회의 내면을 스스로 돌아보고 재발 방지를 위한 노력에 힘을 쏟아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성추행 가해자를 향한 비난을 넘어 한국 사회의 일그러진 민낯을 직시하면서 철저한 반성과 제도적 개선을 병행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주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는 “조직 내부에서 은폐를 시도하고 은폐가 실패하더라도 조직의 안위를 위해 가볍게 처벌하고 넘어가는 관행부터 뜯어고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이번에 문제가 된 인사들을 법과 제도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강력하게 처벌하는 것이 기본”이라며 “시민들의 여론과 연대를 통해 성범죄를 일으킨 사람들은 해당 분야에서 직업활동을 이어나가기 힘든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나윤석·우영탁기자 nagij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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