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 제안서를 미국 기업에 전달해야 하는데, 모레까지 번역해서 보내줄 수 있나요? 가격은 A4용지 제안서 한 장당 2만원 정도로 하시죠.”
국내 통번역사들의 업무는 보통 이런 식으로 시작한다. 기업에서 작업 발주를 하면 그 조건에 맞출 수 있는 통번역사가 수주를 받는다. 그 과정에서 통번역사의 전문성은 생략된다. 빠른 시간과 적은 가격만이 고려될 뿐이다.
하지만 통번역사 업무에서 고려해야 할 점은 이렇게 간단하지 않다. 단순히 통역과 번역에서 그치는 직업이 아닌 탓이다. 통번역 능력 자체의 중요함은 물론이고, 수주 의뢰가 들어온 업계의 전문성을 갖추는 것 역시 필수적이다. 그만큼 고된 노력과 훈련이 뒤따르지 않으면 금세 뒤처지고 만다.
현재 통번역계의 발주·수주 과정에서 생기는 불만은 이같은 인식 차이에서 생긴다. 발주처의 입장과 통번역사들이 원하는 바가 충돌하고 있는 셈이다. 기업은 최저 비용으로 최대 효율을 이끌어 내려고 하다 보니 통번역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아 고민이다. 반대로 통번역사들은 전문성을 토대로 최선의 통번역을 해내고 싶지만, 시간과 비용의 한계가 발목을 잡는다. 둘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방법은 없을까?
통번역 서비스를 제공하는 ‘바벨탑’은 그런 고민에서 탄생했다. 발주처와 통번역사들을 연결해주고, 그 과정에서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통번역 중개 플랫폼 바벨탑을 만든 조은별 대표를 서울 서초동의 로아인벤션랩에서 만나고 왔다.
◇왜 만들었냐고? ‘불편해서요’
바벨탑을 만든 계기를 묻자마자 돌아온 대답은 ‘불편해서’였다. 그는 지난 2015년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을 졸업한 후 한국어-프랑스어 프리랜서 번역사로 2년 동안 일했다. 통번역사 일을 하면서 느꼈던 불편함이 창업의 밑거름으로 쌓인 셈이다.
“2년 동안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불편한 점이 너무 많았어요. 통번역사 업무의 전문성은 높아지고 처리 기간도 짧아지는데, 일은 과거의 방식으로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죠. 이런 도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거나, 이런 방식의 업무 시스템은 어떨지 고민하다가 직접 만들자는 결심을 했습니다.”
각 산업 분야에는 대표 플랫폼이 이미 존재한다. 이제는 익숙해진 ‘배달의 민족’이나 ‘직방’, ‘야놀자’ 등이 그렇다. 그런데 왜 통번역 기반의 플랫폼은 등장하지 않았던 걸까.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품질 관리가 지나치게 까다로운 탓이다. 기업 고객이 통번역 업무를 의뢰하는 경우는 대부분 대외적으로 이용하기 위함이다. 오역이 없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해당 직무의 용어나 흐름 등을 파악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플랫폼을 만들고 기업과 통번역사를 단순 연결해주는 데서 그친다면, 망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조 대표는 전문 통번역사로 일해온 경험 덕분에 까다로운 통번역 품질 관리에 도전할 수 있었다.
“발주처와 수주자의 생리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통번역 기반 플랫폼이 살아남기 힘들죠. 큰 고민 없이 창업에 뛰어들 수 있던 것은 업계가 돌아가는 흐름을 잘 알고 있던 덕분이에요.”
◇아무도 만족하지 않는 국내 통번역 시장
국내 통번역 시장 내 불만족은 어느 한쪽에서 나오지 않는다. 기업 고객과 통번역사 모두 나름대로 불평할 만한 지점이 있다.
기업 입장에서 통번역 업무를 맡길 때 걱정하는 것은 관리의 어려움이다. 번역 의뢰부터 시작해 업무의 진행이 얼마나 이뤄졌는지, 기업이 원하는 방향대로 가고 있는 지 등을 파악하고 싶지만 쉽지 않다. 매번 메일과 전화로 진행 상황을 주고받는 데도 한계가 있다. 겨우 완성본을 받았는데 기대를 크게 못 미치는 결과물인 경우도 태반이다.
통번역사들의 불만은 더 크다. 일을 따오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에이전시로부터 업무를 받거나 발주처로부터 직접 수주한다. 바벨탑이 이화여대와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출신의 통번역사 200명을 대상으로 업무 시 힘든 점을 물어본 결과, 낮은 번역료라는 대답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번역 에이전시와 계약할 경우 번역료가 너무 낮아서 힘들다는 응답이 71.3%였고, 발주처와 직접 거래할 때도 같은 대답은 57.4%에 달했다. 낮은 번역료는 결국 통번역의 질을 떨어뜨린다. 기업 측에서 지나치게 촉박한 납기로 통번역을 요구할 때도, 돈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수주하는 일이 많다. 통번역사 본인의 전문성을 기르는 일은 자연스레 뒤로 밀려난다.
결국 남는 것은 악순환뿐이다. 기업은 품질에 만족하지 못해 통번역 발주비를 더 낮추고, 그 가격에 일을 해야 하는 통번역사들의 고충은 계속된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바벨탑의 장점은 한 마디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서비스다. 기업 고객과 통번역사, 두 집단이 원하는 서비스의 접점을 파고들어 악순환을 끊고 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바벨탑이 자체 개발한 ‘SaaS 번역 솔루션(이하 사스)’다. 기업 입장에서는 통번역 과정을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고, 통번역사는 작업 속도와 번역 품질 향상이 가능하다.
사스는 통번역대학원에서 가르치는 번역의 방법론을 그대로 따라 만들었다. 기본적인 번역 과정은 △원문 읽기 △용어장(전문 단어) 정리 △번역 △피드백 요청 △마무리 번역의 순으로 이뤄진다. 문제는 해당 과정에서 사용하는 소프트웨어가 모두 다르다는 점이었다. 원문은 종이로 프린트해서 읽고, 엑셀로 용어 정리를 한 후 워드프로세서로 번역해 이메일로 피드백을 요청하는 식이다.
“통번역사의 경쟁력은 전문성에서 나옵니다. 용어장을 정리한 엑셀 파일이 통번역사들의 경쟁력을 나타내는 척도로 여겨지는 이유죠. 역설적으로 불편함도 여기서 나옵니다. 종이를 읽고 엑셀에서 전문 단어를 찾은 후, 다시 워드로 작업하는 건 너무 번거로운 일이거든요.”
사스는 쉽게 말해 이 모든 과정을 하나로 합친 도구다. 원문 파일을 사스에 입력하면 통번역사가 가지고 있는 전문용어 DB(데이터베이스) 내 단어가 자동으로 표시된다. 피드백도 사스로 진행한다. 기업은 사스를 활용해 본인이 의뢰한 작업의 진행 상황을 확인하고, 통번역사와 대화가 가능하다.
◇협상하지 말고, 고르기만 하세요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통번역사들의 가장 큰 불만은 낮은 번역료다. 바벨탑은 철저한 품질 관리와 즉시 견적 제도로 이를 해결하고 있다.
“결국 기업 입장에서도 통번역 품질을 믿지 못해 번역료를 낮게 책정한 측면이 있어요. 사스로 그런 의구심을 풀어줌과 동시에 즉시 견적 제도로 보완하고 있죠.”
바벨탑의 서비스를 이용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번역 언어를 지정하고, 전문 키워드를 고른 후에 원문을 업로드하면 된다. 입력과 동시에 4가지 견적서가 도출된다. 단순 번역만 요청하는 수준에서 대외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번역 의뢰까지 품질 수준이 나뉜다. 그 수준에 따라 가격 역시 다르게 책정된다. 통번역사들도 의뢰에 따라 번역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 달라지기 때문에 합리적인 번역료를 받을 수 있다.
“기존 통번역 에이전시가 제공하는 번역료는 ‘통번역 요율’보다 최대 2~3배 가량 낮았어요. 바벨탑은 중개수수료 20%를 제외하고 나서도 통번역 요율에서 정한 최대치에 가까운 번역료를 지급하고 있죠. 협상의 여지를 없앰으로써 통번역 시장에서 가장 큰 문제였던 불투명하고 낮은 번역료를 해결한 겁니다.”
◇시장 반응? 손익분기점 코앞
바벨탑이 시장에 등장한 건 지난해 11월. 그마저도 베타 서비스에 불과하다. 본격적인 운영을 시작한 지 4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손익분기점 돌파를 코앞에 두고 있다. 시장의 반응이 워낙 뜨거웠던 덕분이다.
“통번역 대학원을 졸업한 인력의 이력서만 2,000개를 확보했고, 바벨탑 내에 등록된 전문 통번역사만 500명에 달해요. 전문성을 확보하니 기업들의 업무 의뢰가 시작부터 끊이지 않았죠. 한 번 바벨탑의 서비스를 받은 기업의 재사용률도 50% 이상입니다.”
창업에 들어간 비용이 적었던 것도 큰 힘이 됐다.
사무실은 플랫폼 스타트업 엑셀러레이션 전문 기업인 로아인벤션랩의 김진영 대표에게 현물 투자를 받았다. 조 대표와 김 대표는 친분이 있던 사이가 아니었다. 조 대표의 연락을 받고 사업 설명을 들은 김 대표가 흔쾌히 투자에 나서준 것이다.
대부분의 스타트업들이 어려움을 겪는 개발 인력 확보도 수월했다. 바벨탑의 최고개발이사는 프랑스인인 룩 레메레즈(Luc Lemerez)다. 개발자이자 스타트업 창업 경험자인 그를 만난 것은 소개를 통해서였다. 프랑스어 통번역사였던 조 대표가 국내 프랑스인 네트워크를 잘 알고 있었던 덕분에 섭외가 가능했다.
“운이 좋았어요. 창업을 준비하면서 김 대표님이나 룩 레메레즈, 이대 통번역대학원 교수님과 동문들의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죠. 성신여대 창업지원단에서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셨고요. 그만큼 바벨탑이 잘 커가고 있어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조 대표는 앞으로 더 큰 목표를 꿈꾸고 있다. 이제 막 바벨탑의 운영을 시작했음에도 절반의 성공을 거뒀지만, 만족하지 않겠다는 자세다.
“올해 목표는 업무 수주 3,200건에 번역 거래액 15억원인데 무난히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년에는 통역 서비스도 시작할 예정이에요. 통번역사들의 업무 환경을 더 개선하고, 시장에서 전문성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계속 발전해 나가겠습니다.”
/정순구기자 soon9@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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