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가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가고 있는데 무역환경은 큰 변화가 있습니다. 교역이 세계 경제를 이끌어오던 시대가 저물었고 되레 교역 증가율이 세계 경제 성장률보다 낮은 상황입니다. 똑같은 전략과 똑같은 방식은 이제 어려울 수 있습니다.”
2일 취임 1주년을 맞은 문재도(사진) 한국무역보험공사 사장. 그는 취임 이후 길고 길었던 마이너스 터널을 뚫고 올라선 우리 수출이 공고한 회복세를 이어갈 수 있도록 기반을 탄탄히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렇게 수출이 살아나면서 ‘마의 벽’으로 불렸던 국민소득 3만달러도 올해 돌파가 확실시되고 있다. 3만달러 시대를 연 숨은 공로자인 만큼 자축의 시간을 가질 법도 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보호무역주의의 창궐. 문 사장은 눈앞에 놓인 새로운, 그리고 유례없이 불확실한 환경을 우려했다. 그는 “수출에 의존해서 성장을 찾아가는 게 더는 어렵게 됐다”며 “이제는 되레 다른 데는 수출이 늘지 않는데 우리만 늘어나면 그게 무역마찰이 되는 세상”이라고 진단했다.
무역마찰의 최전선에서 전쟁을 치르는 이들은 정책 당국자일 테다.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인 우리 기업의 수출 다변화를 이끌어야 할 주역은 무역보험공사다. 이를 진두지휘하는 이가 바로 그다. 높아지고 있는 미국발(發) 보호무역 파고에 맞서 ‘응변창신(應變創新·변화에 한발 앞서 대응하고 미래를 주도적으로 개척한다)’을 외치는 문 사장을 서울 종로 무역보험공사 집무실에서 만났다.
/대담=이현호 경제부 차장 hhlee@sedaily.com
무역전쟁으로 치닫고 있는 글로벌 무역질서의 변화를 우려하는 문 사장의 시각은 기우가 아니다. 바로 전날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 경고장이 날아들었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연례보고서를 통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발효 이후 양국의 교역실적을 두고 “전반적으로 큰 실망”이라며 노골적인 평가를 내놓은 것. 2월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미 FTA를 두고 ‘재앙’이라는 섬뜩한 수식어를 붙이기도 했다. 한미 FTA 발효 이후 미국이 우리나라와의 교역에서 본 손해(적자)가 75% 증가했다는 게 USTR의 뼈아픈 지적이었다.
이에 문 사장의 최근 화두는 ‘안전판’이다. 미국 등의 보호무역 조치로 당장 수출선이 잘려나가는 것도 문제지만 이 때문에 환율이 급격히 출렁이게 되면 문제는 전방위로 확산될 수 있다. 더욱이 몇몇 대기업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기업이 환차손실에 고스란히 노출돼 있는 상황이다. 그가 “오는 3월 말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 이후 환율 상황 등을 감안해 환변동보험 지원 확대 정책 연장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환변동보험료 특별할인 등 3월까지 한시적으로 운영되는 지원책을 연장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개별기업이 해외에서 예기치 못하게 당할 수 있는 사고를 최소화하기 위한 플랫폼도 구축한다. 문 사장은 “우리 기업에 해외시장에 진출할 때 뭐가 가장 어려우냐고 물으면 대금을 제때 줄 수 있는 바이어(구매자)인지 파악하기가 힘들다는 답변이 가장 많다”며 “그동안 해외신용조사 등을 통해 파악한 64만개의 해외 수입자 신용정보를 기업들이 손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올해 ‘케이슈어(K-sure) 글로벌 리서치센터’를 구축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문 사장이 그리는 무역보험공사의 새로운 미래는 ‘일자리 창출’로 함축할 수 있다. 그는 “당장 올해 고용 숫자를 지난해보다 늘릴 생각이고 남아 있는 비정규직도 상반기 내 노조와 협의를 거쳐 정규직으로 전환할 계획”이라며 “여기에 일자리 전용 상품을 통해 2022년까지 5만개의 신규 일자리 창출 효과를 거두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무역일자리추진단’을 직접 꾸려 일자리 중심의 무역보험 운영계획을 수립, 시행하고 있다.
꼼꼼한 관료 출신답게 그가 그리는 미래는 치밀하면서도 현실적이었다. 당장 5월 그가 그린 무역보험공사의 새로운 ‘미래’가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일자리 공급망 보증사업’이다. 이 사업은 중소기업이 수출 대기업에 부품을 납품한 뒤 채권을 받는데 중소기업이 이 채권을 은행에 매각할 때 무역보험공사가 보증을 해줘 자금회전을 쉽게 할 수 있도록 하는 상품이다. 문 사장은 “대기업의 국내 1·2차 벤더는 자금결제 미스매치 문제로 일감이 늘어도 일자리를 늘리기가 쉽지 않다”며 “지난해 하도급법 개정으로 원청사가 하청업체에 구매확인서를 발급해주게 돼 있는데 이를 근거로 채권을 현금화해주면 중소기업도 그만큼 일자리를 늘릴 여력이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기업과 국내 우수 기자재 기업을 직접 이어주는 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올 초 9조원 규모의 ‘오만 두쿰 정유 프로젝트’ 발주처와 글로벌 기업 6개사를 초청해 국내 기업을 이어주는 ‘케이슈어 벤더페어’를 개최한 바 있다. 문 사장은 “1월 벤더페어를 하겠다고 하니 하루 만에 200개 기업이 신청했고 이 때문에 당초 하루였던 일정도 이틀로 늘릴 만큼 호응이 좋았다”며 “해외 우량 발주처가 한국산 기자재를 일정 수준 이상 사용하면 장기·저리금융 제공을 약속하는 ‘선금융 후발주’ 전략 등 비보험 업무에서도 일자리 창출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문 사장은 3월에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세계 최대의 발주처인 아람코 등과 ‘제2 두쿰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다.
무역보험의 중심점을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으로 바꾼 것도 그의 공로다. 문 사장은 “지난해 지원실적은 47조9,000억원으로 목표 대비 1조9,000억원 많았고 올해 지원목표는 49조원으로 지난해 목표치 대비 3조원 증가했다”며 “2022년까지 중소기업에 65조원을 지원할 수 있는 도전적인 목표를 담은 중장기경영계획을 지난해 수립했다”고 말했다.
대형 인프라 수주를 위해 무역보험공사의 역량을 높이는 데도 힘을 쏟고 있다. 그는 “무역보험의 포트폴리오를 보면 단기성 보험은 정체 상태인데 이게 선진 무역보험의 일반적인 현상”이라며 “선진국처럼 인프라 등 중장기 프로젝트 중심으로 가기 위해 파이낸싱(자금조달) 부문의 역량을 키우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한국전력공사와 함께 수주협상을 벌이고 있는 영국 무어사이드 원전 프로젝트 참여다.
청렴도도 문 사장이 직접 챙기는 이슈 중 하나다. 그는 “과거 직원이 연루된 몇몇 사기사건 때문에 국민에게 신뢰받지 못한 상황이 있었다”며 “정책금융기관이 국민 신뢰를 얻지 못하고 수출지원을 잘해보겠다고 얘기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노력 탓일까. 최근 공공기관 채용비리에 무역보험공사는 연루되지 않았다. 문 사장은 “공공기관 중에서 가장 빠르게 2015년부터 블라인드 채용을 엄격하게 적용했던 게 원인인 것 같다”고 말했다.
문 사장은 마지막으로 청렴과 리스크 관리 강화도 중요한 덕목이지만 이와 동시에 전문성도 키워야 한다는 철학을 앞으로 무역보험 정책에 녹여내겠다고 밝혔다. 그는 “한쪽에서는 리스크 관리를 강화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무역보험의 적극적인 역할을 요구한다”며 “이율배반적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수레의 양쪽 바퀴로 보는 게 맞다. 한꺼번에 굴러가야 무역보험이 정상적으로 굴러가는 만큼 두 바퀴의 밸런스를 맞춰서 굴려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정리=김상훈기자 ksh25th@sedaily.com 사진=이호재기자
[약력]
△1959년 전남 보성 △1978년 광주제일고 △1982년 서울대 경제학과 △1981년 제25회 행정고시 △2011년 지식경제부 자원개발원전정책관 △2013년 지식경제부 산업자원협력실장 △2013~2014년 대통령비서실 산업통상자원비서관 △2014~2016년 산업통상자원부 제2차관 △2017년~ 한국무역보험공사 사장
풍경화에 빠진 CEO… “50년 만에 붓 다시 들었더니 너무 좋다”
지난해 10월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시내의 한 외곽. 세계무역보험기관 총회 참석 이후 외곽에 있는 산업시설 시찰을 가던 문재도 한국무역보험공사 사장은 슬쩍 지나가는 들판의 풍경을 가슴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그는 “베오그라드 시내에는 폭격을 맞은 건물들이 여전히 서 있는 모습이었는데 조금 외곽에서 만난 전원의 풍경은 너무 평화로워 보였다”며 “그 분위기가 사뭇 대조적이기도 했고 과거 우리나라의 모습과도 비슷해 머릿속에 담아 뒀다”고 말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바로 붓을 들었고 머릿속에 남은 세르비아 평원의 평화로운 단상은 그렇게 화폭 위로 옮겨갔다.
문 사장은 지난 2016년 1월 산업통상자원부 제2차관으로 공직생활을 마친 후 취미생활로 시작한 수채화에 푹 빠져 있다. 그는 “초등학교 때 그림 그리는 걸 무척 좋아했고 또 대회 나가서 입선도 하고 그랬을 만큼 소질도 있었던 편”이라며 “하지만 중학교 들어가서부터는 입시를 준비해야 한다는 집안의 뜻에 따르느라 그림을 접었고 공직생활 퇴임 이전까진 다시 그림을 그리겠다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이후 50년 만에 붓을 다시 든 셈이다.
50년 만이라 그럴까. 아니면 그림을 그리게 되면 잃어버렸던 어릴 적 동심이 살아나기 때문이라 그럴까. 그림 얘기에 문 사장의 얼굴은 어린아이처럼 해맑았다. 그는 “사진 하고 그림은 차이가 크다. 사진은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만 그림은 내가 재해석을 하는 거니까 그동안 많은 집중을 해야 한다”며 “식구들이 보고 좋아하니까 꾸준히 할 수 있는 건데, 푹 빠지고 난 뒤에 취미생활을 하나 갖는 게 얼마나 삶에 좋은 일인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가 자신의 취미생활을 외부에 처음으로 공개한 것은 자신의 아버지를 그린 인물화였다. 풍경에 이어 인물과 정물을 아우르던 소재의 영역은 이제 풍경으로 수렴돼 있다. 문 사장은 “인물화는 너무 세밀한 것 같다. 풍경화가 나랑 맞는다”며 주로 풍경을 그리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자신이 직접 본 풍경이나 사진 속의 풍경 등 그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은 풍경이 주된 소재다.
문 사장이 그린 풍경화는 산업통상자원부 기자실 벽면에도 걸려 있다. 그의 공직 시절 호흡을 같이했던 출입기자단의 요청으로 지난해 그가 기증한 그림이다. /세종=김상훈기자 ksh25th@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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