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 초고속통신망인 5세대(5G) 기술이 미국·중국 안보경쟁의 장으로 들어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아직 공식 합의도 되지 않은 싱가포르 반도체 업체 브로드컴의 미국 퀄컴 인수합병(M&A)에 개입하는 매우 이례적인 조치까지 꺼내 들며 ‘5G 사업의 주도권을 중국에 넘길 수 없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인공지능(AI), 자율주행 시스템 등 일상을 넘어 국방기술까지 좌우할 수 있는 5G 산업을 국가 차원에서 보호하겠다는 포석으로 분석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 재무부 산하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CFIUS)가 5일(현지시간) 퀄컴에 다음날 개최될 예정이었던 주주총회를 30일 연기하도록 명령했다고 보도했다. 이번 퀄컴 주주총회에서는 총 11명으로 구성된 이사진 중 6명을 브로드컴이 선임한 이사 후보로 교체할지 결정할 예정이었다. 퀄컴의 인수액을 1,170억달러(약 127조원)까지 올리며 적극적인 구애를 했던 브로드컴은 “퀄컴이 지난 1월 비밀리에 미국 정부에 조사를 요청했다”며 “퀄컴이 해당 사항을 공개하지 않아 우리는 전날 밤에야 이를 알게 됐다”고 당혹감을 숨기지 않았다.
미국 정부가 브로드컴의 퀄컴 인수에 제동을 건 것은 퀄컴이 가진 5G 기술 때문이라고 WSJ는 분석했다. 퀄컴은 5G와 관련해 다수의 특허권을 소유하고 있어 미국의 5G 기술을 이끄는 기업 중 하나로 꼽힌다. 미 무선통신 기업 인터디지털에 따르면 지난해 초까지 퀄컴이 발의한 5G 표준기술 제안건수는 총 168건으로 미국 기업 중 최대였다. 전체 1위는 총 234건을 제안한 중국 이동통신 기업 화웨이였다. 만약 브로드컴이 퀄컴 인수에 성공하면 미국은 퀄컴이 보유한 5G 기술을 내주게 되는 셈으로 중국과의 경쟁에서도 밀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특히 미국 정부가 5G망 국유화를 검토하고 아직 합의도 이뤄지지 않은 M&A에까지 개입하는 등 급진적 행보를 보이는 것은 5G를 단순한 통신기술이 아닌 ‘군사·안보기술’의 일환으로 보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중국 기업이 5G 기술을 장악해 미국 통신사업에 진출할 경우 미국의 통신기밀이 노출될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더구나 5G의 정보전달 속도는 4G 이동통신(LTE)보다 100배가량 빨라 AI·자율주행차 등 차세대 첨단기술과 이를 활용한 신무기에도 필수적으로 활용될 것으로 전망된다. 시사주간 뉴스위크는 “미국 정부는 중국과의 AI 안보경쟁에서 5G를 핵심으로 보고 있다”며 최근의 5G망, 기술보호 정책을 핵무기 개발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비교했다.
하지만 5G 기술을 보호하기 위한 트럼프 행정부의 행보는 철강·알루미늄 관세 부과 등 각종 보호무역주의 정책과 맞물리며 “정보기술(IT) 시장도 통상전쟁의 장이 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미국 정치권의 견제로 현지 스마트폰 판매계획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화웨이는 “170여 국가에서 스마트폰을 판매하고 있지만 단 하나의 국가(미국)에서만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며 노골적인 불만을 표하고 있다. 미국 키신저중국연구소의 로버트 데일리 소장은 “경우에 따라 구글과 페이스북의 중국 활동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변재현기자 humblenes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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