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전 대통령이 퇴임 이후 1,844일 만에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출두한 14일 서울중앙지검 청사 앞. 오전9시22분께 이 전 대통령이 검은색 제네시스 승용차를 타고 들어섰다. 이윽고 차량에서 내린 이 전 대통령은 미리 준비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고 포토라인에 섰다. 뿔테 안경에 진청색 양복, 하늘색 넥타이 차림이었으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어두웠다. 그동안 검찰 수사를 ‘보복 수사’라고 지적하고 모든 혐의를 적극 부인해온 터라 검찰이나 정치권을 겨냥한 파격적인 내용을 담은 이른바 ‘서초동 담화’가 나올지 이목이 집중됐다.
하지만 서초동 담화에는 혐의를 부인하거나 검찰·정치권을 향한 날 선 비판은 없었다. 이 전 대통령은 ‘국민과 지지자 등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되풀이한 채 서둘러 조사실로 향했다. ‘샐러리맨 신화’의 주인공으로 대통령의 자리까지 오른 그가 뇌물·횡령 등 20여개 혐의를 받는 피의자 자격으로 검찰 조사를 받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 전 대통령은 전두환·노태우·노무현·박근혜 전 대통령에 이어 헌정 사상 다섯 번째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는 전직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도 얻었다.
이 전 대통령이 조사를 받기 위해 향한 곳은 서울중앙지검 1001호였다. 358일 전 박 전 대통령이 조사를 받은 곳이다. 검찰은 모르쇠·부인 전략으로 나설 이 전 대통령 측에 대비해 ‘특수통’인 송경호(사법연수원 29기)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장과 신봉수(29기) 첨단범죄수사1부장, 이복현(32기) 부부장검사를 조사실로 투입했다. 이에 맞서 이 전 대통령 측은 강훈(14기)·박명환(32기)·피영현(33기)·김병철(39기) 변호사가 교대로 입회했다.
9시49분께 시작한 조사에서 검찰은 다스·도곡동 땅 등 차명재산과 김재수 전 로스앤젤레스(LA) 총영사 다스 소송 관여, 대통령 기록물 반출 등 의혹에 대해 집중 추궁했다. 선봉에는 그동안 이들 의혹을 수사해온 신 첨수1부장이 섰다. 검찰은 측근 진술·압수수색에서 확보한 자료 등을 근거로 송곳 질문을 쏟아냈다. 각종 의혹의 열쇠인 다스 실소유주 문제를 먼저 풀고 이후 삼성전자 다스 미국 소송비 대납·김 전 총영사 관여 등 의혹을 파헤친다는 전략을 구사했다.
검찰은 이 전 대통령이 다스 실소유주라는 전제로 김 전 총영사가 소송에 관여했고 삼성전자가 다스 미국 소송비를 뇌물로 줬다고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검찰의 질문 공세에도 ‘다스와 도곡동 땅이 자신의 소유가 아니며 다스의 경영 등에도 개입한 적이 없다’ 또 ‘본인은 모르는 사안으로 실무진에서 이뤄졌다’는 기존 입장만 되풀이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스는 누구 것이냐’를 두고 양측 공방이 약 8시간 만에 끝나자 수사는 오후5시20분께 ‘2라운드’로 접어들었다. 검찰 질문은 이 전 대통령과 측근들이 국가정보원, 기업, 정치인 등에게 110억원대 이르는 뇌물 수수 의혹으로 넘어갔다. 이 전 대통령이 이팔성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 성동조선, ABC 상사, 대보그룹, 김소남 전 의원 등 민간 부문에서 2007년 대선자금 등 뇌물을 받았다는 게 의혹의 핵심이다. 송 특수2부장은 이들 의혹에 대해 측근 증언 등 증거를 앞세워 파상공세에 나섰으나 이 전 대통령은 ‘모른다’나 ‘아니다’라는 입장을 유지했다. 특히 수차례 압수수색에서 드러난 자료나 관련자 진술이 각종 의혹을 입증할 결정적 물증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방어 논리를 펼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이 전 대통령은 묵비권을 행사하거나 진술을 거부하지 않고 본인 입장을 충실하게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이 전 대통령이 받고 있는 혐의는 뇌물,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횡령, 조세포탈 등 20여개에 이른다. 그만큼 검찰이 묻고 확인할 사항이 많다. 검찰이 조사 전 이 전 대통령에게 ‘조사가 길어질 수 있다’는 언급을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질문 공세에 나선 검찰과 적극적 방어권을 행사한 양측의 ‘칼’과 ‘방패’가 격돌하면서 이 전 대통령 조사는 이날 밤늦은 시간까지 이어졌다.
/안현덕·이종혁기자 alway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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