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권 특혜 채용, 특혜 공천, 공공분야 수주 특혜 등등. 뉴스를 읽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불평등’을 실감한다. 불평등의 얼굴은 불법의 몸통 위에만 있지 않다. 잘못된 시스템, 비뚤어진 규칙, 왜곡된 프레임과 그로 인한 정치적 선택 위에서도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불평등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콜롬비아대학 교수가 신경제(New Economy)를 열기 위해 지난 40년간 우리를 불평등의 늪에 빠뜨렸던 경제 규칙을 새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경제 규칙 다시 쓰기’는 “불평등은 불변의 경제학 법칙이 아니라, 정치적 선택의 결과”라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 발생한 전체 소득증가분 중에서 91%가 최상위 부유층, 1%의 미국인들에게 돌아간 데는 부유한 사람들에게 더 유리한 규칙이 있었고 규칙의 출발은 정치적 선택이라는 것이다. 스티글리츠는 불평등을 만들어 내는 오늘날의 경제 구조를 빙산에 빗대 설명한다. 불충분한 일자리와 복지, 불안한 미래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실제로 자본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불평등 요인은 그 아래 있다. 대주주와 이사회에 막강한 권한을 몰아주고 보상하는 기업 거버넌스, 각국의 법인세 인하 경쟁, 턱없이 낮은 최고 세율, 금융소비자의 희생 위에 세워진 대마불사 보호 제도, 여성·흑인 등에 대한 구조적인 차별 등 경제의 틀을 형성하는 규칙들이 수면 아래서 우리의 삶을 통째로 흔든다. 스티글리츠가 다시 써야 한다고 말한 경제 규칙은 바로 빙하 아래 있다. 이 관점대로라면 재분배를 통해 불평등을 완화하자는 주장은 극약 처방에 불과하다. 근본적 문제를 바꾸지 않고는 결국 불평등이 우리의 공동 번영을 해칠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이제 불변의 자연법칙처럼 따르던 전통 경제학의 허구를 벗어던질 때다. 노동생산성 대비 노동소득분배율이 높아지지 않은 이유를 수요와 공급 곡선으로 설명하는 대신 1인1표의 대의 민주주의가 기업들의 막강해진 정치적 영향력으로 ‘짝퉁 민주주의’로 전락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게 좀 더 솔직하다.
책의 2부에서는 새로운 경제 틀을 형성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 제안이 나오지만 이중 가장 방점을 찍어야 할 것은 포용적 민주주의를 위한 제도 변화다. 스티글리츠는 투표를 쉽게 만들고 거액 기부금의 영향력을 낮출 수 있는 선거 자금 조달 시스템을 만들자고 주장한다. 또 한가지 솔깃한 제안은 기업이 정치 기부금을 지원할 때 반드시 주주 의결을 거치도록 하자는 것이다. 소송 비용 대납, 측근을 통한 우회적 지원 등으로 전 대통령들의 비리 혐의에 숱한 기업들이 이름을 올린 대한민국에 꼭 필요한 제안으로 보인다.
출판사 열린책들은 이 책이 원래 루스벨트 연구소에서 정치적 의사 결정자들에게 영향을 미칠 목적으로 작성한 보고서라고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적 의사 결정자는 클린턴이었다. 뉴욕타임스 역시 이 책은 “수 십 년간 경제 정잭을 다시 쓰자는 클린턴 경제자문의 제안”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미래 권력에게 제안하는 정책 자문이었던 만큼 책 속의 제안들은 조세정책부터 기업 지배구조, 금융산업 재편, 교육과 일자리까지 다양한 영역을 아우른다. 지금의 미국은 이 보고서를 읽을 참모도, 실행에 옮길 지도자도 없는 나라가 됐지만 책에 소개한 세세한 정책 조언은 적어도 잃어버린 10년 뒤 새로운 미래를 쓰려는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1만5,000원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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