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서울서부지검 재소환에 응한 안희정(53·사진) 전 충남지사는 취재진에게 “합의한 성관계인 줄 알았는데 고소인들은 아니라고 하더라”며 “죄송하다. 조사 결과 따라 법적 처벌도 달게 받겠다”고 밝혔다. 비난 여론을 의식해 자세를 낮추면서도 성폭력 고의성이 없었고 피해자들도 행위 당시 명시적으로 거부하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한 셈이다.
안 전 지사는 지난 5일 전 충남도 정무비서 김지은씨가 고소장을 접수한 뒤부터 “강제성이 없었고 상호 합의된 성관계였다”는 주장을 일관되게 유지해 왔다.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더연) 소속 연구원 A씨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이었다. 안 전 지사 측 변호인은 “행위 당시 당사자들이 의사와 행동이 자유로운 상태였고 상호 합의가 있었다”고 밝혔다. 이날 안 전 지사도 “합의가 아닌지 몰랐다”며 행위 당시 강제성이 없었을 뿐 아니라 고의성도 없었다는 취지로 기존 입장보다 한 발짝 나아간 주장을 폈다.
성폭력 사건에서 고의성은 범죄성립요건과 양형 판단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가해자가 끝까지 피해자의 행동을 오산해 쌍방 합의로 알았다고 주장하면 형법상 범죄 구성요건에 해당하지 않아 무죄로 판결날 가능성도 있다. 지난 2016년 창원시에서 20대 남성이 만취한 여성을 모텔 계단으로 끌고 가 강간을 시도한 사건도 “여성이 도망치지 않아 쌍방 합의인 줄 알았다”는 남성의 주장을 재판부가 받아들여 무죄 판결을 내렸다.
공은 다시 검찰에게 넘어왔다. 검찰은 안 전 지사가 정말 피해자 내심(內心)을 알고도 이에 반하는 성관계를 시도했는지 입증해야 한다. 안 전 지사가 김씨에게 보낸 “미안하다”, “스스로 감내해야 할 문제를 괜히 이야기했다”는 내용의 텔레그램 메시지는 안 전 지사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지난 5일 김씨가 밝힌 대로 안 전 지사가 폭로 직전 ‘내 행동이 상처가 됐느냐’며 미투 폭로 정황을 살폈다는 점도 참고인 진술로 확인되면 불리한 증거가 된다. 그러나 현재까지 알려진 증거는 안 전 지사와 김씨가 출입한 장면이 담긴 서울 마포구 오피스텔 폐쇄회로(CC)TV가 전부다.
한 성폭력 사건 전담 변호사는 “고의가 없었다는 주장은 성폭 사건마다 나오는 전형적 주장”이라며 “사건 당시 고의성 여부를 면밀히 판단하려면 최근 수년 치 통화내역·카카오톡 증거·텔레그램 등 모든 증거를 총동원해 평소 두 사람의 관계를 입체적으로 유추해내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검찰 관계자는 “수집한 증거를 바탕으로 면밀하게 조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신다은기자 down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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