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일선 현장의 파열음이 커지고 있다. 일부 기업들이 선제적으로 근로시간 단축 근무에 들어간 가운데 이에 따른 부작용들이 속속 나오고 있는 것이다. 급기야 직원들이 청와대 국민청원에 민원을 제기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주 35시간 근무제를 도입한 신세계 계열사(신세계푸드)에서 10년 이상 근무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모 청원자는 ‘권력자의 횡포’라는 글에서 “요즘 각 회사마다 내건 ‘워라밸’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근무인력이 보장돼야 하며 그러지 못할 경우 근무자가 상응하는 보상을 받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이어 “회사에서는 국가에서 허용하는 42시간 특근시간도 무시한 채 인력부족·생산여건·개인능력 등을 이유로 연장근무와 특근을 통제하고 있다”며 “회사원은 노예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한 청원인은 ‘시급제의 현실을 아는가’라는 글에서 “특히 시급제 근로자는 일한 만큼 급여가 결정되는데 근로시간을 단축하면 국가에서 책임지고 임금 보전을 해줄 건지 궁금하다”며 “제발 시급제 근로자의 현실을 알고 범죄자 만들지 말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 외에도 ‘근로시간 단축 없애주세요’ 등 다양한 청원이 올라와 있다.
오는 7월부터 종업원 300명 이상 대기업에 근로시간 단축(68시간→52시간)이 예고된 가운데 이미 선제적으로 근로시간을 줄인 삼성전자·LG전자·SK하이닉스·신세계 등은 현장에서 예상치 못한 혼란이 적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신세계푸드도 한 사례다. 신세계푸드는 35시간 근무에서 제외돼 있다. 회사의 한 관계자는 “워라밸 기조에 따라 근무환경을 개편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종의 마찰적 상황으로 해석하고 있다”며 “초과·연장근무를 줄이는 과정에서 강요는 없었다”고 밝혔다.
일선 현장에서 말하는 근로시간 단축 혼란은 이뿐만이 아니다. 대기업에서 연구개발(R&D) 부서를 담당하는 김 팀장은 근로시간만 생각하면 골치가 아프다. 회사가 자체적으로 주당 52시간 시범실시에 들어간 상태다. 팀원 열댓 명 중 한두 명을 뺀 거의 전원이 3주 연속 가이드라인을 지키지 못하고 있어서다. 김 팀장은 “한 달 전에 신제품이 나와 어쩔 수 없다”며 “이런 식으로 간다면 3개월마다 주당 52시간을 맞추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김 팀장의 사례처럼 대기업 R&D 부서의 경우 스마트폰이 됐든, TV가 됐든 신제품 출시 수개월 전부터 연장근무가 비일비재하다. 사실상 3개월마다 점검하는 주당 52시간 근로제를 맞추기 어렵다. 그래서 대기업들은 점검주기를 최소 6개월, 최대 1년으로 늘려달라고 한목소리로 주장하고 있다. 한 대기업 임원은 “관련 부서 직원을 더 뽑거나 효율성을 높여 문제를 해결하기는 한계가 있는 만큼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게임 업계도 사정은 비슷하다. 신작 출시의 경우 야근이 불가피하다. 주 52시간 근무는 경쟁력 하락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넷마블은 지난해 근로 문화 개선에 전사적 노력을 기울이며 선제적으로 야근과 주말근무를 폐지했지만 17개를 내놓을 계획이던 신작의 수는 8개에 머물렀다. 넥슨도 올해 예정 신작 수를 지난 해 15개에서 올해 12개로 하향 조정했다.
생산직과 관련한 고충도 있다. 계절상품이나 히트상품 등 수요가 일시적으로 많이 몰리는 제품의 경우 대응이 쉽지 않다. 결국 사람을 더 뽑아야 하는데 그러기가 어렵다. 성수기만 보고 채용을 늘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자동차 업계에서는 일률적인 주 52시간 근로제 시행이 경쟁력을 저해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자동차부품 업체 L사가 그 사례다. 이 회사는 지난달부터 업계 최초로 유연근무제에 돌입했다. 시행 한 달이 채 되지 않은데다 사무직에 한정해 적용하고 있지만 일부 우려가 나오고 있다. 팀장 및 팀원 간 출퇴근시간이 일정하지 않다 보니 업무 지시나 협의가 제때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것. 시급한 사안의 경우 문자나 카톡을 통해 전달하지만 이 역시 퇴근 이후 직원들의 사생활을 침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주저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이런 분위기는 모바일을 기반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에서는 더욱 심화되는 분위기다. 서비스 내용이 변경되거나 새로운 서비스가 업데이트되려면 실시간 모바일 대응이 이뤄져야 하는데 기획파트나 마케팅파트, 웹디자이너간 실시간 의사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상황이다. 더구나 밤샘 작업이 자주 있는 웹디자인의 경우 근로시간 단축으로 인해 원천적으로 힘들게 되면서 서비스가 전반적으로 지연되고 있다는 지적이 내부에서 나오고 있다.
식음료 업계도 예외는 아니다. 성수기와 비성수기가 극명하게 갈리는 맥주·빙과·음료 업계가 대표적이다. 종전에는 성수기에 임시직원을 뽑아 늘어나는 수요에 대응했지만 근로시간 단축이 시행되면서 평상시에도 추가적으로 고용이 필요한 상황에 처했다. 사실상 주야간 근무 개념이 없는 영업직 역시 근로시간 단축을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
아울러 최대 52시간 근무제를 시행해본 기업은 기존의 근무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적지 않은 인력과 자금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52시간 근무에 따른 새로운 근무관리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기 때문이다. 신세계그룹의 경우 주 35시간 근무제 도입을 위해 준비하는 데만 2년이 걸렸다.
또 이들 기업은 앞으로 바뀔 근로시간 규제가 노사 분쟁에 악용될 가능성도 우려하고 있다. 주 52시간 근무제를 어긴 사업주는 형사처벌(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 벌금)을 받는다. 사업주는 회사 대표이사, 관련 업무 부서장, 해당 기업 등을 의미한다. 경영진이 법적 리스크를 피하려면 평소 주 52시간 근로제 준수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근거를 남겨야 하는데 시행해본 결과 이것이 쉽지 않다. 한국경영자총협회의 한 관계자는 “이미 시행에 들어간 사업장들을 보면 앞으로 주 52시간 근로제가 확대될 경우 분쟁이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정민정·이재유·신희철·이태규·양사록기자 0301@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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