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외교무대에서 외톨이 은둔생활을 했던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다. 2011년 집권 이후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국가주석에게 비핵화 의지를 표명했다. 오는 4월 말 남북 정상회담, 5월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중국을 든든한 후견인으로 끌어들여 협상의 주도권을 쥐겠다는 고도의 전략이 숨어 있다. 한반도 비핵화 ‘체스판’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자신이 ‘게임 체인저’가 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28일 중국 신화통신과 CCTV 등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25~28일 스텔스식 중국 방문기간에 시 주석과 만나 “김일성·김정일 위원장의 유훈에 따라 한반도 비핵화 실현에 주력하는 것은 우리의 시종 일관된 입장”이라며 “우리는 자발적으로 긴장완화 조치를 했고 평화적인 대화를 제의했다”고 말했다. 중국까지 가세한 국제사회의 제재에 못 이겨 토끼굴을 박차고 나온 것인데 자신이 평화 모드를 조성했다는 자찬(自讚)으로 포장했다. 하지만 곧 그의 계산된 속내가 드러난다. 김 위원장은 “만약 한국과 미국이 선의를 갖고 우리의 노력을 받아들이고 평화안정 분위기를 조성하며 단계적으로 보조를 맞춘다면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핵심 단어는 ‘단계적’이다. 미사일 발사 중단, 핵 동결, 핵시설 폐기, 비핵화 등 단계별 협상을 하면서 미국과 한국, 나아가 국제사회로부터 거둬들이는 경제보상을 극대화하겠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살라미 방식이자 벽돌 깨기 전술이다. 국제사회가 공고하게 쌓아올린 ‘제재 벽돌’을 하나둘씩 허물며 실리를 챙기겠다는 속셈이다. 이는 미국이나 한국의 접근방식과 배치된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 내정자는 “바로 비핵화로 들어가야 한다. 북한이 시간을 끌면 협상장을 박차고 나올 것”이라고 압박한다. 우리 정부도 비핵화와 평화협정·종전선언을 같이 진행하는 ‘원샷’ 방식을 선호한다. 본론에 들어가 릴레이 협상을 벌일 때 삐걱거리는 소리가 언제든지 나올 수 있는 상황이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김 위원장과 시 주석이 주고받은 비핵화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북한은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이후 25년간 수많은 협상에서 ‘비핵화는 유훈’이라고 목청을 높였지만 정작 실행단계에 들어가면 국제사회의 사찰을 거부했다. 여섯 차례의 핵실험은 언행 불일치의 방증이다. 우리 정부가 북한과의 고위급회담, 뒤이은 정상회담에서 비핵화 담보방안은 소홀히 한 채 경제제재 완화에 치중하는 전략적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 다른 외생변수는 그동안 판세를 관망하던 시 주석이 비핵화 체스판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점이다. 시 주석은 김 위원장과의 정상회담에서 “중국은 한반도 문제에서 건설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며 “북한을 포함한 각국과 함께 노력해 한반도 정세 완화를 추진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북중의 전통 우의는 양국 선배 지도자들이 이룩해온 것”이라며 “북중 우호협력 관계를 고도로 중시하고 강화할 의지가 있다”고 강조했다. 기존 패권국인 미국과 통상·대만·남중국해 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는 상황에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패권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경고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번 김 위원장 방중의 첫 목적은 경제제재 완화다. 주요 2개국(G2) 간 대립이 증폭되거나 한국이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동조하면 중국은 언제든지 보복 차원에서 북한에 대한 제재를 이완시킬 수 있다. 문재인 정부가 중국에 물샐 틈 없는 제재 유지를 설득해야 하는 숙제가 남은 셈이다.
한미 주도로 순풍을 탈 것 같았던 북한 비핵화 협상이 앞길을 알 수 없게 됐다. 김 위원장은 비핵화의 반대급부로 더 많은 ‘경제지원 칩(chip)’을 요구할 것이고 시 주석은 한반도의 헤게모니를 놓지 않으려 한다. 눈치 보기 탐색전이 끝나고 이제 본게임이 시작됐다. 문 대통령이 선언적인 비핵화가 아니라 비핵화를 담보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정교하게 다듬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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