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월 17일 김경원 당시 주미대사는 최광수 외무장관 앞으로 긴급문서를 보냈다. 제목은 ‘중공인사 방한희망’.
중공 최고 지도자인 덩샤오핑의 여동생 덩샤오푸가 방한을 희망하며 한국 측으로부터 초청장을 보내줄 수 있는 지 한국계 미국인 김모씨를 통해 주미대사관에 문의를 해왔다는 내용이었다. 아울러 덩샤오푸는 개인적인 비즈니스 목적으로 방한을 희망하고, 방한할 경우 일체 비밀로 할 것을 전제로 하면서 한국 측의 ‘정식’ 초청을 요망했다고 전했다. 이에 외무부는 긴급 확인에 들어갔다. 방한 의사가 사실일 경우 방한을 환영하고 대외비밀 유지도 보장하겠다면서도 덩샤오핑의 친여동생이 확실한 지 먼저 확인할 것을 주미대사관에 다시 지시했다. 이에 주미대사관은 ‘은밀하게’ 알아보겠다고 답했는데 그 결과는 어땠을까. 덩샤오핑에게는 남동생만 2명이 있고 여동생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중간에서 다리를 놓으려던 김모씨는 덩샤오푸가 덩샤오핑의 친척임은 확실하다고 강조했다. 게다가 결국 덩샤오푸는 중공 내 정세변화로 방한이 어려워졌다고 다시 김씨를 통해 우리 측에 연락을 취했다. 결국 덩샤오핑 친여동생 방한 건은 일종의 해프닝으로 끝난 것이다. 이 같은 내용은 30일 비밀 해제 된 1987년 외교문서를 통해 공개됐다.
당시 우리 정부가 잠깐이긴 하나 긴박하게 움직였을 정도로 중국 최고위층 가족의 방한은 가능성 만으로도 비밀리에 진행해야 할 대형 사건이었다. 북한과 관계도 의식해야 했지만 경제적인 면에서 한국과 중공이 급속히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외교문서에는 당시 중공시장의 특성으로 ‘세계 최대의 시장 잠재력 보유, 세계적인 자원 보유국이나 저개발상태’란 표현이 담겨 있었다. 또 중공과의 교역은 원칙적으로 교역이 불허된 상태이지만 홍콩 등 제3국을 경유한 간접교역이 묵시적으로 허용돼 있다고 서술돼 있다. 다만 중공 역시 한국과 교역 확대를 원하지만 “북한이 동의하면 직교역은 당연히 가능하다”는 식의 답변을 일본 언론인을 통해 전한 사실이 대외비로 기록돼 있었다.
/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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