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 빨았다.’ 국방과 안보를 취재하는 기자의 입장에서 올해와 같은 여유를 처음 누린다. 북한의 핵실험이나 탄도미사일 발사를 전후로 미국의 선제 폭격설이 돌며 위기가 고조되던 예년과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편안하게 지낸다’는 의미로 병영에서 주로 쓰이는 꿀 빨았다는 말이 실감 난다.
문제는 언제까지 ‘데탕트(긴장 완화)’ 분위기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북한과 미국의 대치 속에 평창동계올림픽을 대화의 기회로 활용한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의 노력은 외신의 보도대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3주 후 열릴 제3차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도 높다.
문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을 맞아 가시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낮다. 남북 정상회담은 최종 합의점을 도출하는 자리가 아니라 정거장이기 때문이다. 한반도가 전쟁 위기로 회귀하느냐 아니면 평화 체제에 진입하느냐는 북미 정상회담에 달렸다.
북한의 김 위원장이 문 대통령에게 속을 보일지도 미지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담판을 벌여야 하는 김 위원장이 과연 협상 카드를 남북 정상회담에서 미리 꺼낼까. 트럼프가 누구인가. 1987년 출간돼 뉴욕타임스(NYT)의 논픽션 부문 베스트셀러 1위에 32주간 머물렀던 ‘거래의 기술’의 저자다. 협상 이론에 밝고 경험이 많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결승전을 앞둔 김 위원장은 문 대통령과의 예선전에서 전력을 다 드러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남북 정상회담 발표문은 국민의 기대 수준에 못 미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청와대도 이를 모르지는 않으리라.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방법은 문 대통령과 청와대 스스로 기대를 낮추는 데 있다. 남북 정상회담은 한반도 평화 정착이라는 최종 목표를 위한 징검다리일 뿐이라는 사고와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책임은 크고 가시적 성과는 없을 듯한 남북 정상회담에 임할 문 대통령께 두 가지를 주문드리고 싶다.
첫째, 김 위원장에게 시간 끌기나 단계적 기만책인 ‘살라미 전술(salami tactics)’은 지금까지의 학습 효과로 통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하게 인식시킬 필요가 있다. 북한은 ‘미국이 먼저 중유 공급 약속을 깼다’는 식의 주장을 들고 나올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현재다. 미국은 물론이고 북한의 시간 끌기에 염증을 내는 국민이 많다. 두 번째로 최소한의 공동 비전이 나왔으면 좋겠다. 남북 지도자가 다음에 다시 만날 일정만 잡아도 남북 정상회담은 성공이다. 남북 분단 이후 세 번째, 10년6개월 만의 정상회담이 앞으로 정례화한다면 더욱 좋은 일이다.
잇따른 정상회담이 성공을 거둔다면 그 공(功)은 트럼프에게 돌아가는 것이 낫다. 애써 기획하고 실행해 지금까지의 성과를 이룬 청와대로서는 속이 아프겠지만 약소국의 비애를 넘기란 어렵고 위험하다. 한반도의 운전대를 완전히 잡고 있다고 자신하기에는 아직 때가 안 찼다. 결정권을 사실상 쥐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의 속내는 알 수 없다. 미국 내 입지와 중간선거·재선을 위해 ‘북핵 문제 해결’이라는 공적이 필요해 보이나 강경파 참모 등용과 평소의 언행에 미뤄 밀어붙이기 일변도의 협상 전략을 구사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평화의 싹이 움트는 것 같지만 변혁의 소용돌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앞으로 1·2개월 사이에 한반도 분단 체제의 방향성이 결정된다. 정부의 어깨에도 무거운 짐이 걸렸다. 전쟁과 평화 사이에 놓인 무수한 가능성을 하나하나 검토하고 대안을 마련해야 하는 과부하가 걸린 것이다. 경제부처라고 예외가 아니다. 평화 체제는 기회일 수도, 부담일 수도 있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논문 제목(‘평화의 경제적 귀결’)을 빌리자면 전쟁과 평화의 경제적 귀결까지 고민해야 할 순간이다.
1차 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한 베르사유회담에 영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여했던 케인스는 위 논문에서 경고를 날렸다. 주요 국가들의 과도한 증오심과 책임을 타국에 떠넘기려는 태도가 패전국 독일에 혹독한 배상을 안겼으며 새로운 분쟁(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봤다. 경제 제재라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매진해온 북한이 과연 핵·경제 병진 노선을 포기하며 비핵화에 나설 것인지, 각국이 해묵은 불신과 반목을 털 수 있을지에 한반도의 운명이 걸렸다. 적지 않은 우려에도 올해 상황은 ‘봄 같지 않은 봄’ ‘잔인한 4월’을 걱정하던 예년보다는 훨씬 좋다. 여러 가지 불안 요소가 경제적 꿀로 귀결되기를 바란다. 꿀 만들 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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