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1년 만에 ‘평화, 새로운 시작’이라는 화두로 판문점에서 제3차 정상회담을 했다. 지난해 북한의 도발로 야기된 극단적 남북 대치와 국제고립 상황은 2018년 신년사로 국면 전환의 물꼬가 트였다. 물론 한국의 적극적 협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김정은 신년사의 핵심 골자는 ‘핵 있는 상태에서의 민족공조(또는 대화와 협력)’다. 핵 있는 상태에서의 민족공조는 지난 21일 조선노동당 7기 3차 전원회의 결정서가 재확인해주고 있다. 이번 정상회담은 11년간 단절된 대화를 복원한다는 측면에서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만남이 만남 자체로 끝나지 말아야 한다는 중압감이 있다. 북핵 폐기로 한반도와 동북아의 진정한 평화를 구축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회담 성공 여부의 가늠자는 ‘북핵 폐기’에 얼마만큼 실질적 진전이 있는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판문점에서 김 위원장은 ‘새로운 역사는 이제부터, 평화의 시대, 역사의 출발점에서’라는 방명록 문구를 통해 이번 회담에 임하는 의중을 처음 표명했다. 여기서 ‘새로운 역사’와 ‘평화의 시대’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역사’란 북한의 2018년 신년사와 노동당 전원회의 결정서에서 강조한 핵 있는 상태에서의 민족공조를 의미한다. 바로 새로운 역사란 핵보유국의 지위를 굳건히 한 상태에서 사회주의 경제 건설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김정은의 저의를 엿볼 수 있는 표현이다. 또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한국의 경제 지원을 우회적으로 압박한 것이다.
그리고 ‘평화의 시대’는 북한이 상투적으로 주장한 북한판 ‘평화협정’ 체결을 강조한 것이다. 사실 북한은 한반도 평화에 대해 “미국이 한국을 군사적으로 강점하고 있어 한반도에 비평화적 정세가 조성돼 있다”며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주한미군은 철수해야 한다”는 상투적 주장을 분단 후 반복해왔다. 따라서 김정은의 ‘평화의 시대, 역사의 출발점’이라는 문구는 주한미군 철수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1974년 북한이 처음 평화협정 체결을 제기한 후 단골 메뉴였다는 점에서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평화협정 체결은 주한미군의 운명과도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은 ‘북핵 폐기’의 첫걸음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문 대통령의 “통 크게 대화를 나누고 합의에 이르러 온 민족과 평화를 바라는 세계의 사람들에게 큰 선물을 만들어줬으면 좋겠다”는 언급에서 북핵 폐기에 대한 기대가 엿보인다. 하지만 남북은 비핵화라는 용어를 같이 사용하지만 실제적 의미는 동상이몽이다. 즉 한국(국제사회 포함)에 비핵화는 북핵의 완전한 폐기를 의미한다. 반면 북한은 김일성 주석이 1986년 ‘조선(한)반도의 비핵지대화(Nuclear Free Zone)’를 주장한 것을 비핵화로 포장하고 있다. 북한의 비핵지대화란 ‘우선 북한 체제를 위협하는 핵전략 자산 문제가 해결돼야 하며, 아니면 최소한 ‘국제적 핵감축’의 틀에서 핵 문제를 협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논리다. 결국 북한의 비핵지대화는 ‘국가 핵무력 완성을 정당화’하는 논리였고 ‘미국과의 핵감축’을 위한 논리였다는 점에서 남북의 비핵화는 동일한 개념이 아니라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 이번 회담에서 후환을 없애기 위해 비핵화의 의미를 명확히 해야 한다.
북한은 20~40개의 핵탄두를 보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북한의 핵 보유가 기정사실화한 상황에서 북핵이 한국 안보에 직접적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다. 4차 핵실험 후 한반도선진화재단의 남북한 군사력 비교를 보면 한국 100, 북한 130이라는 분석도 있다. 한편 한국에 직접적 위협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아니라 중단거리미사일인 점을 감안할 때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강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방향은 북핵의 완전한 폐기에 모아져야 하며 허구적 평화협정에 매달리는 것은 위험천만하다. 협정(문서)에 따른 평화가 실질적 평화를 보장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바로 남북 및 미북 관계 개선의 전제는 ‘북핵 폐기’이다. 그래야 한반도의 진정한 봄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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