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테일(long tail)’에서 혁신의 기회가 생기고 있다. ‘20대80의 법칙’이 뒤집어졌다. 상위 20%의 히트상품이 아니라 긴 꼬리(long tail)의 수많은 틈새시장에서 막대한 가치가 창출되는 시대다. 디지털 혁명이 가져온 이러한 변화는 바이오 분야에서도 좋은 혁신 착안점을 제공해준다. 바이오는 그 어느 분야보다도 꼬리가 길다. 연구 대상이 되는 생물의 종은 약 1,400만종이 넘고 의학·약학·이학·공학·농학 등 학문 분야와 보건·의료·농업·환경·에너지와 같은 응용 분야도 매우 다양하다. 이를 반영하듯 정부의 바이오 연구개발(R&D) 과제들은 다른 어느 분야보다도 소규모로 분산돼 있다. 지난 2016년 기준 3조3,000억원인 정부의 바이오 R&D 예산은 약 1만8,000개가 넘는 과제들로 구성돼 있으며 과제당 평균 1억8,000만원 규모다. 5억원 이하의 과제가 전체의 95%이며 1억원 이하도 69%에 달한다. 이렇듯 바이오는 그 꼬리가 길고도 길다.
이 긴 꼬리에 내포된 또 하나의 중요한 특성은 ‘불확실성’이다. 장기간의 제품 개발에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과 강한 규제요인이 불확실성을 키우는 주된 원인으로 언급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아직 설명이 부족하다. ‘과학비즈니스’의 저자인 게리 피사노 하버드대 교수에 따르면 ‘모른다는 사실 자체를 알지 못하는 뿌리 깊고 지속적인 불확실성’이 바이오 과학 비즈니스 전반에 걸쳐 있다. 대부분 생명현상이 여전히 미지의 블랙박스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바이오 분야는 극도의 다양성으로 세분화돼 있어 체계적 관리가 어려울 뿐 아니라 그 본연의 뿌리 깊은 불확실성은 혁신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그런데 최근 4차 산업혁명의 파급으로 바이오 분야에도 일대 변혁이 생겨나고 있다. 디지털과 바이오기술이 서로 융합되면서 예전과는 현격히 다른 ‘새로운 바이오 시대’가 열리고 있다. 전 세계의 연구자들이 클라우드컴퓨팅에 힘입어 가상공간에서 협력하면서 공동의 바이오 빅데이터를 만들고 있고 인공지능을 활용해 신약을 개발하고 있다. 바이오의 특징인 극도의 다양성이나 세분화는 더 이상 혁신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아니다. 오히려 생명현상의 근본적 불확실성을 극복해가는 다양한 접근 경로이자 아이디어가 숨 쉬는 생태계이며 혁신의 자원이다.
정부의 ‘바이오경제 혁신전략 2025’도 이러한 시대적 조류에 부응한 다양한 대응책을 제시하고 있다. 산·학·연·병 융합연구조직을 구축하고 이미 구축된 바이오 R&D 빅데이터 DB의 공동활용을 위한 융합R&D 플랫폼 기반을 강화하며 핵심전략 연구 분야별로 산학연 연구자들의 연계를 지원하는 코디네이팅센터를 운영할 계획이다. 또 R&D 성과의 산업적 연계를 가속화하기 위해 기술혁신을 도모하는 법을 제정하고 국가전략자원 선정 및 산업적 활용을 추진하며 세계적 바이오 정보통합서비스 체계를 구축하는 등 다양한 혁신 플랫폼 구축 방안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이러한 플랫폼의 성공을 위해 특히 강조하고 싶은 개념이 있다. 바로 ‘연결’이다. 결국 연결이 플랫폼을 만든다. 일견 당연해 보이지만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결코 녹록한 과제가 아니다. 빅데이터 플랫폼을 구축했다고 말은 하지만 활용이 거의 안 되는 정체된 DB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세계로부터 고객을 끌어올 역량은 생각하기 어렵고 그래서 공급자 중심의 저장고와 같은 ‘사일로(silo)’로 닫혀 있는 꼴이다.
바이오의 다양성만큼이나 폭넓은 ‘빅 플랫폼’이 필요하지만 그 플랫폼은 내부자 중심의 혁신을 넘어 외부의 다양한 수요·공급 채널과 연결된 개방형 혁신의 체계를 갖춰야 한다. 바이오 부문의 고유 R&D활동만이 아니라 타 분야 전문가 혹은 아마추어, 일반 시민에 이르기까지 내외부를 아울러 집단지성을 활용하는 부분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서야 비로소 바이오 혁신의 긴 꼬리도 잡을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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