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들려줄 이야기는 푸릇푸릇하기보다는 검푸르고 찰랑거리기보다는 축축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다.
시작은 닫힌 사물함에서 풍기는 알 수 없는 냄새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여유 시간마다 폐기(유통기한이 지나 처분하는 음식물)를 먹는 모습을 생중계하는 다은(배우 김윤희)의 사물함이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창고가 무너져 숨진 다은의 사물함은 자물쇠로 굳게 닫힌 채 친구들에게 냄새로 말을 건다. ‘신경 안 쓰면 안 쓴 티가 나기 마련인 거 같고, 그럼 결국 선택받지 못하는 거’라고 말하는 그 사물함을 친구들은 열지도 외면하지도 못한다. 생애 처음으로 경험하는 죽음과 가난의 냄새는 이다지도 지독하다.
다은의 유일한 친구이자 상류계급 진입을 꿈꾸는 연주(배우 정연주), 그리고 다은에게 가끔 담배를 샀던 재우(배우 정원조), 다은이 아르바이트하던 편의점 사장의 딸 혜민(배우 조경란), 편의점이 세를 내고 있는 건물주의 아들 한결(배우 이리) 등 친구라기엔 그리 가깝지 않았던 다은 주변의 아이들, 사회의 축소판처럼 층위를 이루며 다은을 내려다 보았던 아이들은 갑작스러운 죽음, 가난을 목격하며 동요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미성년’이라는 껍데기 안에 숨겨져 있던 그들의 두려움과 고뇌, 치열한 투쟁과 부채의식을 피하기 위한 발버둥이 무대 위에 고스란히 풀어 헤쳐진다. 슬픔이나 애도는 없다. 어리기 때문에 보호받을 수 있다는 특권도, 어리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도 없는 사회의 자화상에서 아이들은 차갑기만 하다.
청소년극이라는 테두리 안에 머물기엔 이 작품 속 주인공의 면면은 그저 교복만 입혀놓은 우리의 모습이다. 감정적이고 미숙해 보이지만 이들이 입 밖으로 꺼내놓는 직설적인 말들은 어른들이 습관처럼 내뱉는 폭력의 언어, 치졸하고 냉혹한 선 긋기의 연장선 상에 있다.
‘사물함’은 극작가 김지현의 데뷔작이자 극단 ‘여기는 당연히, 극장’을 이끌고 있는 구자혜 연출의 첫 번째 청소년극으로,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는 지난 12월 낭독공연을 거쳐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서 본 공연을 선보인다.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통찰력을 드러냈던 전작처럼 청소년 극에서도 사회의 민낯을 고스란히 무대 위로 올려놨다.
‘나는 과연 살아서 어른이 될 수 있을까’라며 숱한 질문을 던졌던 작가는 어른이 되어 이 글을 썼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청소년, 그리고 함께 살아남은 어른들을 위해. 6일까지 소극장 판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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