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노동당이 핵·경제 병진 대신 경제 ‘올인’으로 노선을 수정했다. 이어 지난달 27일 열린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경제발전에 큰 관심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로 인해 북한이 이번 대화를 계기로 핵과 경제를 맞바꾸고 개방을 통한 신흥공업국의 길로 나설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특히 김 위원장이 지난 3월 말 방중 당시 시진핑 국가주석에게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의 길을 빨리 걸었어야 했는데…”라고 말한 것으로 뒤늦게 전해지면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성과와 김 위원장이 이를 북한 경제에 어떻게 활용할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오늘의 中 만든 덩샤오핑의 결단=‘아시아의 병자’라 불리던 중국이 세계 최강국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주요2개국(G2)으로 도약한 데는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선포한 것은 40년 전인 1978년이다. 그해 12월 중국 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에서 덩샤오핑은 인민 모두가 잘사는 ‘다퉁(大同)사회’를 목표로 하는 사회주의 계획경제 시스템에서 중산층 중심의 ‘샤오캉(小康)사회’로 국가와 공산당의 목표를 바꿨다. 샤오캉사회를 이루기 위해 그가 내세운 개혁·개방은 ‘흑묘백묘(黑猫白猫)’라는 실용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중국을 잘살게 하는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자본주의도 수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가 마오쩌둥의 교조주의를 넘어 중국식 시장주의인 개혁·개방에 나선 데는 덩샤오핑의 청년 시절 프랑스 유학 영향이 컸다. 16세 때 프랑스 유학길에 올라 1925년 21세 때 공산당원이 됐고 1926년 모스크바를 거쳐 중국으로 돌아온 후 중국 공산당 활동에 뛰어들었다. 김 위원장이 스위스 유학파라는 점과 연계지어 생각해볼 수 있는 부분이다. 또 그는 미국과 1979년 수교를 단행했고 중국 지도자 최초로 미국을 방문했다. 1980년 광둥성 선전을 시작으로 경제특구를 잇따라 건설했다. 1989년 톈안먼 사태 때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오히려 1992년 ‘남순강화’로 개혁·개방에 속도를 올렸다. 그 결과 1978년 3,645억위안이었던 중국 국내총생산(GDP)은 지난해 82조7,122억위안으로 227배 증가했다.
◇김정은이 개혁·개방 나선다면?=미국과의 핵 담판에서 비핵화 문제를 마무리 짓고 이에 대북제재가 완화된다면 김 위원장은 2012년 집권 이후 추구해온 자신만의 경제 개혁·개방 정책을 실현하는 데 총력을 기울일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식 표현대로라면 △‘경제개발구’ 활성화 △시장화 전략 △우리식 경제관리 방법 등이 이에 해당한다.
북한의 경제개발구는 현재까지 20곳 이상 설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현재 높은 대북제재로 외국자본을 들여오지 못해 무용지물인 상황이다. 제재 완화가 이뤄지면 외자 유치를 통해 이곳을 활성화하려고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아울러 그간 자력갱생 차원에서 강조해온 신흥 공업 분야를 키우는 데 주력할 것으로 관측된다. 김 위원장은 수시로 화장품·식료품·자동차·신발 공장 등을 직접 견학하며 생산을 독려하고 있다. 또 그간 북한에서 시장과 관련해 불법으로 간주됐던 조치들을 합법화하는 절차에도 착수할 것으로 전망된다.
전문가들은 북한의 진정한 변화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사상 해방의 징조와 내각의 권한 변화를 주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에 앞서 중국에서도 그와 같은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임수호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북한의 발전 이데올로기인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 노선’과 중공업 우선주의가 개방·개혁의 맥락에서 어떤 형태로 변주되는지 관찰할 필요가 있다”며 “또한 당 경제부와 당 군수공업부, 내각과 제2경제위원회의 역할이 조정된다면 변화의 징후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베이징=홍병문특파원 정영현기자 hb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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