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종전’이 화두에 오른 2018년. 평화 체제에 대한 구상이 무르익는 한편에서는 전쟁의 참상을 고스란히 간직한 증거가 드러났다.
지난 2월, 서울 우이동에서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지가 발견됐다. 그 동안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지가 여러 곳에서 확인됐지만, 서울에서 민간인 학살 현장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우연히 발견된 현장에서는 6구의 유해가 수습되었고, 함께 출토된 고무신, 틀니, 은비녀 등의 유품과 아군의 탄약류 등으로 미루어 보아 희생자는 군인이 아닌 민간인으로 추정된다. ‘PD수첩’은 학살 현장의 목격자와 최초 발견자를 만나 희생자로 유력한 일가족의 흔적을 좇아 심층 취재했다.
같은 달 충남 아산에서도 민간인 유해가 대규모로 발굴되었다. 약 40일간의 발굴에서 수습된 유해는 200여 구. 이 중 50여 구는 어린아이의 유해였고, 구슬과 장난감 등 유품도 함께 출토되었다. 하지만 아산 발굴 현장을 찾은 희생자 유가족은 두 가족뿐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발생한 부역혐의 사건의 경우, 혐의만으로도 온 가족이 몰살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전문가의 설명이다. 다행히 살아남은 가족들도 ‘빨갱이’라는 오명과 연좌제 피해로 힘든 세월을 견뎌야 했고, 때문에 여전히 많은 유족들은 또다시 정권이 바뀌면 무슨 일을 겪을지 모른다며 제작진의 인터뷰 요청에도 입을 다물었다. ‘PD수첩’은 한국전쟁 당시 부역혐의로 가족을 잃고 멀리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뒤 아산 발굴 소식을 듣고 한국을 찾았던 유족을 어렵게 만났다.
군인 사망자보다 민간인 사망자가 훨씬 많았던 한국전쟁. 이들 중 일부는 적군이 아니라 국군과 경찰에 의해 조직적으로 학살되었다. 그러나 반세기가 넘도록 진상 규명은 되지 않았고, 희생자 유족들은 오히려 숨죽이고 살아 왔다.
참여정부 들어서야 비로소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하여 4년여의 조사 기간 동안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으로 20,620명이 희생되었음을 파악했지만, 이는 100만 명으로 추정되는 희생자의 2%에 불과한 수치이다. 신청되지 않았거나 진실규명 불능인 수많은 사건을 남긴 채 진실화해위원회는 이명박 정부 때 성급히 종결되었다. 이후 국가 차원의 진상조사는 멈추었고, 전국에 150곳 이상으로 추정되는 미발굴된 집단학살 매장지의 유해 발굴 역시 희생자 유가족과 민간 조사단의 몫이 되었다. 그나마 발굴이 진행된 일부 지역에서도 유해의 영구 봉안 등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권고하고 있는 화해와 위령사업은 제대로 진행되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정부의 조치를 기다리다 못해 1995년 유족들이 스스로 발굴한 고양시 금정굴의 유해들 역시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임시로 안치되어 떠돌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실 규명이 되었음에도 사건의 가해자인 태극단 등 일부 보수단체의 반대와 지자체의 무관심 속에 유족들은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PD수첩’은 1995년 당시 발굴에 함께했던 금정굴 현장을 유족과 함께 다시 찾았다.
국가의 불법행위로 희생된 억울한 죽음은 50년이 지나서야 일부 진실이 규명되었지만,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온 유족들은 국가의 배상 책임을 요구하기 위해 법정에서 또다시 전쟁을 치러야 했다. 배상 제도가 따로 없어서 국가의 범죄 행위에 대해 민사 소송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이다. 특히 2013년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의 전원합의체 판결 이후로 긴급조치를 포함한 수많은 과거사 피해자들의 국가배상 소송은 소멸시효 등의 문제로 패소했다. 뿐만 아니라 배상금을 삭감하는 대법원의 판결에 따라 국가가 희생자 유족을 상대로 ‘부당이득금’을 반환하라는 소송까지 제기하면서, 유족들은 이중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더욱이 2015년 이러한 대법원의 지침에 반하여 긴급조치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를 받아들이는 하급심 판결을 내린 판사에게 법원행정처가 징계를 시도했다는 정황이 드러나 또다시 논란이 일고 있다. 과거 박정희 정권에서 행해진 각종 불법행위에 대해, 박근혜 정부 당시 사법부가 앞장서 면죄부를 준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다.
지난해 문재인 정부는 국정과제 중 하나로 올해 상반기에 진실화해위원회 2기 활동을 재개해 과거사를 청산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법무·검찰개혁위원회는 국가 공권력에 의한 반인권적 범죄의 피해자들이 제기한 국가배상 청구 소송에 정부가 소멸시효 항변을 하지 않을 것, 그리고 판결 과정에서 가지급받은 배상금이 문제될 시 배상금 반환을 요구하지 말 것을 정부에 권고했다. 이에 관해 지난 3월 표창원 의원 등은 국가의 불법행위로 발생한 피해자의 배상 청구 소송에 소멸시효를 두지 않도록 하는 이른바 ‘정원섭법’을 발의했다. 이처럼 현 정부 들어 과거사 해결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모양새이지만 실효성 있는 결과를 내놓을지는 아직 의문이다. 진실화해위원회 2기 출범의 법적 근거인 진실화해기본법 개정안은 국회의 파행 속에 기약 없이 묶여 있고, 올해 70주년을 맞아 4월에 통과될 것을 기대했던 제주4.3특별법 개정안 역시 여전히 국회에 계류 중이다.
현재 발의되어 있는 4.3특별법 개정안은 불법 군사재판 무효화와 배·보상 등을 담고 있으나, 정부의 조치를 기다리다 못한 군사재판의 피해자인 4.3수형인 생존자들은 직접 명예 회복을 하기 위해 재심을 청구해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 민간인 학살은 적법한 절차 없이 자행된 국가 폭력에 의해 죄 없는 국민이 희생당한 범죄이다.
2018년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에 이어 종전이 논의되고 있는 지금, 갈등과 상처로 점철된 과거사의 비극을 딛고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과제를 담은 ‘PD수첩’은 오늘 5월 8일(화) 밤 11시 10분에 방송된다.
/정다훈기자 sesta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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