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밥을 먹지 않고 남아메리카산 퀴노아만 먹습니다.”
나집 라작 전 말레이시아 총리는 지난 2월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이 같은 말을 했다가 국민적 분노를 낳았다. 말레이시아인들의 주식인 쌀 대신 가격이 23배나 비싼 퀴노아를 먹는다는 말은 부패 스캔들로 이미 입지가 좁아진 나집 전 총리에 대한 여론을 한층 악화시켰다. 야당 인사들은 그를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에 비유하며 비판의 수위를 높였다. ‘쌀(말레이시아인)과 퀴노아(나집) 간 대결’이라는 프레임은 5월 총선에서 나집 전 총리가 고배를 마시고 여러 비리에 연루되며 구속위기에까지 몰리는 데 일조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나집 전 총리가 당을 줄이기 위해 쌀 대신 주식으로 선택했다는 퀴노아는 애초 말레이시아인들의 공분을 살 만큼 값비싼 작물이 아니었다. 쌀보다 조금 작고 둥근 모양의 퀴노아는 고대 잉카제국 시대부터 남미 사람들의 주식이었지만 쌀과 밀·옥수수 등 다른 대체작물들이 유입되면서 일부 농가에서만 키우게 된 작물일 뿐이었다. 20여년 전만 해도 페루 등 남미에서는 닭 모이로도 쓰지 않을 정도로 ‘가난뱅이’만 먹는 곡물로 취급받아왔다.
하지만 퀴노아가 쌀 대비 칼슘이 7배, 칼륨이 6배, 철분은 무려 20배에 달할 정도로 각종 영양소로 가득 차 있는데다 밀가루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글루텐을 함유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천대받던 퀴노아는 하루아침에 ‘신이 내린 선물’이라는 찬사와 함께 ‘슈퍼푸드’의 대표작물로 자리 잡게 됐다. 이후 퀴노아의 몸값이 치솟으면서 정작 원산지인 남미인들은 먹지 못하는 웃지 못할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불에 익힌 퀴노아에서 섭취 가능한 단백질 등의 영양가치는 우유에 맞먹는다. 유엔 국제농업기구(FAO)도 퀴노아의 영양적 요소를 높게 평가하며 가난한 사람들의 식량혁명에 기여할 목적으로 2013년을 ‘세계 퀴노아의 해’로 정하기도 했다.
퀴노아의 인기는 전 세계적으로 고조되는 건강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다. 각종 영양소와 노화방지물은 풍부한 반면 열량과 지방 함량이 적어 건강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눈에 들어온 슈퍼푸드는 몸값을 달리하며 각광을 받고 있다. 지금도 세계인들은 퀴노아처럼 수천년 전 고대 곡물에서부터 바닷속 해조류까지 새로운 슈퍼푸드 찾기에 혈안이 돼 있다.
슈퍼푸드라는 용어는 1980년대 미국과 캐나다에서 식이요법을 연구하는 의사나 전문가들 사이에서 처음 사용됐다. 이 용어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은 2004년 미국의 스티븐 프랫 박사가 세계적인 장수지역인 그리스와 일본의 오키나와 지역을 연구한 결과를 담은 ‘나는 슈퍼푸드를 먹는다’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그는 슈퍼푸드에 대해 △각종 영양소가 풍부한 대신 콜레스테롤이 적고 △해독작용은 물론 항산화 작용을 하거나 △면역력을 증가시키고 노화를 억제하는 식품이라고 정의하면서 14개 식품을 슈퍼푸드로 뽑았다. 이후 타임지가 이 중 10가지를 추려 ‘세계 10대 슈퍼푸드’를 선정, 소개하면서 전 세계는 슈퍼푸드 열풍에 휩싸였다. 당시 타임지가 꼽은 슈퍼푸드는 블루베리·귀리·토마토·시금치·레드와인·견과류·브로콜리·연어·마늘·녹차다. 이후 기존 식품 중 새로운 효능이 알려지고 임상으로 증명되면 어김없이 슈퍼푸드라는 타이틀이 붙으면서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글로벌 스타들이 애용하는 슈퍼푸드는 곧 전 세계로 퍼져나가며 품귀현상을 보이기도 했다.
현재 슈퍼푸드는 고령화가 상당히 진행되고 있는 선진국을 중심으로 현대인의 세련된 건강식으로 빠르게 자리 잡고 있다. 최근 몇 년째 지속되는 슈퍼푸드 붐은 관련 산업의 성장으로도 이어졌다. 일본에서는 이세탄백화점 신주쿠 본점 지하 2층의 뷰티 매장인 아포카리가 슈퍼푸드 관련 제품을 취급하면서 매출이 1년 9개월 만에 6배나 확대되는 등 슈퍼푸드 관련 기업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 들기름에 치매를 예방할 수 있는 오메가3가 다량 함유돼 있다는 소식으로 2015년 일본에 들기름 붐이 일면서 한국산 들기름 수출도 급증했다. 당시 한국의 대일 농식품 수출은 엔저의 영향으로 전년동기 대비 10.2%(2015년 1~7월 기준) 감소했지만 들기름 수출만은 1만4,758%나 폭증했다.
여기에 통조림·스낵 혹은 슈퍼푸드를 갈아 물이나 커피·샐러드 등에 첨가해 먹을 수 있는 파우더 등 간편함을 무기로 한 제품들도 속속 등장하면서 슈퍼푸드의 저변은 더욱 확대되는 추세다.
영국 슈퍼마켓 체인인 웨이트로즈에서 낸 ‘식품과 음료에 관한 보고서(2017~2018)’를 보면 슈퍼푸드 관련 즉석식품은 매출 상승세를 보인 상위 10대 인기 식품 명단에 올라 있다. 영국에서는 부동의 1위인 계피가루를 제치고 슈퍼푸드로 인식되는 강황이 그 자리를 차지했으며 기존의 샐러드에 퀴노아·견과류 등 슈퍼푸드를 넣어 만든 ‘석가모니의 한 그릇’이라는 뜻을 가진 ‘붓다볼’이라는 요리는 지난해 영국 인스타그램 최고의 인기태그 목록에 들기도 했다. 한국무역협회는 슈퍼푸드를 갈아 만든 슈퍼파우더를 올해 미국 식료품 시장의 키워드로 뽑기도 했다. 최근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차나 스무디·수프 등에 첨가하는 강황·카카오·모링가·케일·시금치 등의 파우더가 유행하고 있다.
슈퍼푸드가 인기를 끌자 유럽에서는 남미산 작물을 직접 재배하려는 움직임도 일어나고 있다. 네덜란드는 지난해 30만㎏의 퀴노아를 재배했고 올해는 50만㎏으로 재배량을 늘릴 것으로 전망된다. 또 남미처럼 고산지대가 아닌 낮은 지대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퀴노아 품종 개발에 성공하면서 네덜란드뿐 아니라 프랑스·영국·독일·이탈리아·덴마크 등 유럽 전역으로 퀴노아 재배가 확대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최근 홍천을 중심으로 실제 퀴노아 재배가 이뤄지면서 고랭지의 새로운 소득원으로 주목받고 있다. /노현섭기자 hit8129@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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