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협상의 판이 완전히 깨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게 “회담과 관련해 마음이 바뀌면 주저 말고 내게 전화하거나 편지해달라”고 메시지를 보낸 것은 회담은 취소했지만 대화의 뒷문은 열어놓겠다는 표시다. 북한도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의 ‘위임에 따른’ 담화 방식으로 “대범하고 열린 마음으로 미국 측에 시간과 기회를 줄 용의가 있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김 위원장이 트럼프의 서한에 답신을 한 모양새를 취한 셈이다. 당장은 아니지만 대화 재개 가능성이 점쳐지는 대목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북미 간 이견을 조율하려면 우리가 중재에 나서야 하는데 쉽지 않다. 미국의 한국에 대한 불신이 심상치 않은 탓이다. 한국 정부는 미국에 ‘북측이 회담을 요청했다’고 전했지만 북측은 ‘미국이 먼저 대화를 청탁했다’고 정반대로 말했다. 정부는 북의 비핵화 의지를 확인했다고 했지만 북측은 대미 비난만 쏟아냈다.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때 약속했던 핵 전문가 참가도 이뤄지지 않았다. 한미 정상회담 직전 기자회견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답변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이 “통역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북미회담 취소 과정에서 나타난 한미공조 이상 조짐은 더 심상찮다. 청와대는 미국의 기습조치에 “트럼프 대통령의 정확한 뜻이 무엇인지 파악 중”이라고 밝혔다. 23일 한미 정상회담까지만 해도 “북미 정상회담은 예정대로 제대로 열릴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던 문 대통령은 하루 만에 “당혹스럽고 매우 유감”이라는 정반대 반응을 보였다. 미국으로부터 사전 통보나 교감이 전혀 없었다는 의미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 북한 비핵화 협상 중재 과정에서 한미공조에 뭔가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우려가 나오는 게 당연하다.
정부가 미국의 신뢰를 잃는다면 중재 외교도 ‘한반도 운전자론’도 소용없다. 오히려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한국 패싱’이 다시 떠오를지 모른다. 미국의 불신요인을 서둘러 제거하고 한미공조를 복원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흔들림 없는 원칙과 한미동맹의 강고함을 재확인하는 것은 이를 위한 첫걸음이다.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인 우리가 논의에서 배제되는 불상사는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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