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 월정사에 머물던 사명대사가 금강산 유점사로 거처를 옮긴 지 2년 정도 지난 1592년 임진왜란이 터졌다. 파죽지세로 북진하던 왜군이 유점사에까지 들이닥친 것은 그해 6월. 왜군들은 유점사에 침입해 20여명의 승려들을 묶어두고 행패를 부리며 금은보화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조선 고찰에는 금으로 만든 불상과 많은 보물이 있을 것으로 믿었던 모양이다.
이 소식을 듣고 사명대사가 한달음에 달려가 왜적에게 소리쳤다. “금은보화는 온 나라 안에서도 희귀한데 초의(草衣)를 입고 채식하며 사는 중들이 어찌 금은보화를 쌓아뒀겠느냐.” 이렇게 조목조목 이치를 따져 설명하자 적장이 수긍하며 승려들을 풀어준 뒤 큰 판자에 이런 글귀를 써서 사찰 문에 걸어두고 돌아갔다. ‘이 절에는 도승이 있으니 모든 군사는 들어오지 말라.’
전해오는 사명대사의 무용담이다. 사명대사 같은 고승이 수도 장소로 선택할 만큼 유점사는 유서 깊고 웅장한 대사찰이었다. 우리나라 중세 사적 가운데 가장 높고 화려한 건물로 꼽힐 정도다. 이곳은 신라 남해왕 때 창건돼 고려·조선을 거쳐 일제강점기까지도 크게 융성한 불교 본산 중 하나로, 절과 주변에 큰 느릅나무가 많아 ‘느릅나무 유(楡)’자가 들어간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조선 태조 이성계도 성대한 보살재(菩薩齋)를 베풀려고 했을 정도로 유점사를 아꼈다고 한다. 이런 연유인지 조선 초기에 한동안 이성계의 존영(초상화)이 여기에 보관돼 있기도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는 상태다. 불에 타고 복원되기를 수차례 반복하다 결국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폐허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창건설화를 간직한 53불상,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됐을 당시 쓴 ‘보문품’ 등 귀중한 보물들이 사라졌으니 ‘오호 통재’라는 탄식이 절로 나올 만하다. 그나마 동종(銅鐘) 등 일부라도 묘향산 보현사로 옮겨져 보존돼 있어 다행이다.
통일부가 최근 유점사 복원 문제 등을 협의하기 위한 세계평화재단 이사장 천담 스님의 방북을 승인했다는 소식이다. 현 정부 들어 민간교류로는 처음이다. 방북단이 6일까지 머문다니 논의가 잘돼 유점사 복원이 궤도에 오르기를 기대한다. 남북화해 분위기가 조성된 이참에 금강산 4대 사찰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표훈사와 고구려 고분벽화 등 북쪽 문화재를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바라는 건 욕심일까. /임석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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