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유럽을 대표하는 연출가 토마스 오스터마이어로 말할 것 같으면 의미와 재미,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연출가다.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담은 연극을 재미있게 빚어내기로 정평이 난 장인, 그것도 30대부터 세계 연극계의 이정표를 쓴 젊은 장인이다. 19세기 관객들에겐 현대 여성의 지향점이었던 노라(헨릭 입센의 ‘인형의집’)의 손에 총을 쥐어 주는가 하면 스타킹과 팬티 차림으로 가장 전복적인 햄릿 캐릭터를 구현했던 오스터마이어다. 그런 그가 문학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악인으로 꼽히는 리처드 3세를 자기만의 스타일로 빚어내기로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2년 전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문제작 ‘민중의 적’으로 관객들을 불꽃 튀는 난장으로 불러냈던 오스터마이어가 오는 14~17일 연극 ‘리처드 3세’로 한국을 찾는다. 이번에도 극장은 LG아트센터다.
셰익스피어 초기(16세기말로 추정) 걸작으로 꼽히는 ‘리처드 3세’는 영국 요크 왕조의 마지막 왕이자 악의 화신이었던 리처드 3세의 이야기다. 비틀어진 신체와 영악한 두뇌를 지녔던 리처드 3세는 세 치 혀로 형제와 조카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하며 왕좌를 차지하지만 그에 맞선 리치먼드 백작, 헨리 튜더(헨리 7세)와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최후를 맞는다.
올 한해만 세 명의 ‘리처드 3세’가 한국 관객을 찾을 정도로 리처드 3세는 연극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캐릭터다. 지난 2월 황정민이 10년만에 연극 무대 복귀를 선언하며 택한 작품도 ‘리차드 3세’였고 국립극단 역시 다음달 프랑스의 장 랑베르-빌드와 함께 하얀 분 칠을 한 광대 버전의 ‘리차드 3세’를 선보일 예정이다.
‘나이 든 유럽 연극계가 지목한 후계자’ ‘유럽 연극의 미래’로 꼽히는 오스터마이어가 말하는 연극의 임무는 “동시대를 살고 있는 개인들의 사회, 세상, 삶으로부터 겪게 되는 좌절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리처드 3세’를 연출한 이유도 그의 연극관과 일맥상통한다. 그는 “선과 악의 경계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작품을 연출하고 싶었다”며 “우리 인간들 하나하나의 깊은 내면과 스스로 맞닥뜨릴 수밖에 없게 만들기 위해 철저하게 비도덕적인 작품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리처드 3세처럼 비도덕적인 행동을 저지르고 싶었던 적은 한 번도 없는지 관객에게 묻는 작품”이라며 “가장 어두운 본능을 다루는 자유로운 공간에서 관객들은 우리의 행동을 제어하는 사회·도덕적 제약으로부터 해방되고 정화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매력적인 악인을 통해 관객들을 선과 악의 경계 위에 세워보겠다는 그의 의도는 갖가지 연출 기법에서 빛을 발한다. 우선 객석과 무대의 경계를 허물고 배우들을 관객 사이에 세운다. 배우들은 셰익스피어 시대를 재현한 반원형 무대와 객석을 넘나들며 광장을 누비듯 연기를 펼치고 무대에서는 강한 비트의 드럼을 라이브로 연주한다. 꽃가루와 흙먼지가 흩날리는 무채색의 무대에서 관객들은 오로지 배우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강한 비트에 몰입하게 된다.
‘리처드 3세’는 2015년 베를린에서 초연한 이후 같은 해 여름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 이듬해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공연하며 극찬을 받았다. 연극 ‘햄릿’에서도 설득력 있는 연기를 펼쳤던 라르스 아이딩어가 리처드 3세의 복잡한 심리를 폭발적인 연기로 표현해낼 예정이다.
한편 베를린 에른스트 부쉬 예술학교에서 연출을 전공한 오스터마이어는 28세에 졸업과 동시에 베를린 도이체스 테아터의 소극장 바라케의 예술감독으로 전격 발탁된 데 이어 31세에 현대 실험 연극의 중심지인 샤우뷔네 베를린의 예술감독에 오를 정도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오스터마이어는 프랑스 문화부로부터 오피시에(Officer des Arts et des Lettres, 2009)와 코망되르(Commandeur, 2015) 작위를 받았고, 2011년에는 제41회 베니스 국제 연극 페스티벌 비엔날레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거머쥐기도 했다.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사진제공=LG아트센터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