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얼굴만 알던 그의 이름을 비로소 기억하게 된 작품은 ‘싱글즈’였다. 동네에 있을법한 보통사람. 때로는 어눌하고, 또 어색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능력자가 되는. 그는 관객과 시청자가 편안하게 지켜볼 수 있는 인물을 통해 자신만의 캐릭터를 완성했다.
‘홍반장’에 이어 남자들의 탄식과 발구르는 소리, ‘어휴’ 내뱉는 한숨이 극장을 꺼지게 만들고도 남았을 ‘광식이 동생 광태’까지. 스크린 적응기를 마친 후 그가 만들어낸 인물들은 추리닝 입고 편의점에 담배 사러 가는 동네 형들과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편안함, 허술함, 때로는 세련되고 유머러스한 그는 배우로서 자리를 잡고 나자 확실한 존재감을 보였다.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은 그의 매력에 힘입어 31%의 시청률로 대박을 쳤다. 이제 확실하게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고 봐도 무방했다.
돌아보면 이 시점부터 그는 끊임없이 연기 변신을 시도한 듯 하다. 사람들의 머리에 남을 이미지를 구축한 배우들은 보통 위험을 택하지 않는다. 빨리 톱스타로 떠오른 배우들은 인기가 떨어지기 무섭게 연기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그들은 비슷한 캐릭터만 연기해 안전을 꾀하거나, 그도 아니면 수년간 CF활동에만 매진한다.
반면 그는 꾸준했다. 익숙한 인물로 등장할 때와 아닐 때의 흥행성적은 차이를 보였다. ‘광식이 동생 광태’ 이후 수년간 ‘아내가 결혼했다’와 ‘방자전’ 외에는 이렇다할 흥행작이 없었다. 홍보사들은 ‘연기변신, 캐릭터 변신’을 내세웠으나 당시만 해도 그의 작품들은 캐릭터 소비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정점에서 계단을 내려가는 듯 했다.
2011년 ‘투혼’ 언론시사회에서 그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났다. 큰 기대는 없었다. 영화는 재미있었으나 그의 얼굴은 밝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해탈했다고 표현해야 할까. 인터뷰에서도 과한 농담과 이슈를 만들어내기 위한 억지 에피소드 짜내기가 없었다. 분명 의외였다. 광식이 캐릭터가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몇 년이 지난 뒤 그가 ‘1박2일’의 구탱이 형이 되었을 때 눈앞이 번쩍였다. 영화에서의 캐릭터와 과거 시사회에서의 모습이 구탱이형과 꼭 닮았다. 그는 예능 출연으로 인한 이미지 소비를 걱정했지만, 걱정에 무릎을 꿇은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가져야 할 필수 덕목이 상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함께하는 것이라는 걸 그를 보며 처음 깨달았다.
‘독전’을 보기 위해 극장으로 향하는 내내 그 특유의 슬며시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공조’를 통해 악역 연기도 본 터라 적응도 됐겠다 싶었다. 웬걸, 이런 상 약쟁이가 따로 없었다. ‘오아시스’의 문소리가 장애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충격과 같았다고 할까. 아니 뭔 이런 내적폭발을 그동안 어떻게 참고 살았나 감탄하다 그만 울컥했다. 조금만 더, 한 장면만 더 나오라고 빌었다.
그는 ‘독전’을 통해 일생일대의 캐릭터 전환을 시도했다. 주연이 아니어도, 샤프하거나 다정하거나 재미있지 않아도 된다고. 구탱이형의 이미지를 깨버리겠다고. 그도 아니면 이제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을 조금씩 밟아가도 괜찮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관객 각자의 판단은 달랐으나 마음만은 같았을까. 그가 스크린과 작별하는 순간 객석에서는 탄식이 터져나왔다.
사람들은 그의 연기변신을 역대급이라 말하지만, 이는 치열한 고민의 산물이라 생각한다. 그가 걸어온 길이 탄탄대로가 아니었던 것은 그의 선택 때문이었다고 믿는다. 비슷해 보이는 캐릭터 안에서도 새로운 면을 찾던, 그리고 결국 완벽하게 달라진 인물로 마지막 작품에서 자신을 각인시키는데 성공한 그에게 박수 대신 탄식을 보낼 수밖에 없다는 현실은 먹먹하기만 하다.
그의 지난 연기를 평하자면 ‘맑음’이라 말하겠다. 이제 다시 그를 논하라면 ‘날씨’와 같은 배우라 부르겠다. 맑은 하늘이 흐려졌다 바람이 불다 비가 오다 천둥이 치다 자고 일어나면 다시 해가 떠있듯, 김주혁은 그런 연기를 보여준 배우였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너무나도 좋은 배우를 잃었다.
/최상진기자 sesta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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