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로 프로그램 받아서 안 빼먹고 하고 있어요.”
지난달 국내 대회에 출전했을 때 만난 김효주(23·롯데)는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빙긋이 웃었다. 앞서 올해 초 인터뷰 때 “바지가 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하체 근육이 커졌다”며 걱정 아닌 걱정을 털어놓았던 그다. 김효주는 “시즌 중이라 거의 미국에 있으니 트레이너를 만날 수는 없지만 휴대폰으로 운동 프로그램을 받아서 그대로 꼬박꼬박 하고 있다”고 했다.
김효주의 올 시즌 준비는 그전과 완전히 달랐다. 그동안 맨몸운동만 하다가 기구를 이용하는 고강도 웨이트트레이닝을 처음 시도했고 훈련량이 많기로 선수들 사이에 악명높은 새 코치를 스스로 찾아갔다. 40일간의 미국 훈련 동안 김효주는 ‘달리기-연습 라운드-샷 연습-달리기-웨이트트레이닝-달리기’로 이어지는 지옥훈련을 묵묵히 소화했다. 이렇게까지 스스로 몰아붙인 적은 처음이었다고 한다. 항상 함께했던 아버지와 떨어져 홀로서기를 시작한 것도 올 시즌부터다.
“비시즌 때 지옥에 갔다 와야 시즌 때 천국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던 김효주가 비로소 천국 문턱을 밟은 분위기다. 김효주는 4일(한국시간) 미국 앨라배마주의 쇼얼크리크클럽(파72)에서 끝난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메이저대회 US 여자오픈에서 연장 끝에 준우승했다. 우승을 놓친 아쉬움보다 앞길에 대한 희망이 더 커 보이는 패배였다.
김효주는 선두 에리야 쭈타누깐(태국)에 6타나 뒤진 6언더파 단독 3위로 출발했다. 전반 9홀을 마치고 나서는 7홀 차로 더 벌어져 있었다. 김효주는 그러나 쭈타누깐이 후반 들어 트리플 보기와 보기로 흔들리는 사이 1타를 줄였다. 15번홀(파4)에서는 그린 밖에서 굴린 버디 퍼트마저 넣어 1타 차까지 압박했다. 마지막 세 홀에서 김효주가 모두 파로 마친 사이 쭈타누깐은 1타를 잃어 11언더파로 같아지면서 둘의 승부는 연장으로 이어졌다.
기선을 제압한 쪽은 김효주였다. 14·18번 두 홀 합산으로 진행된 연장에서 김효주는 14번홀(파4) 6m 버디로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하지만 18번홀(파4) 보기 탓에 파-파를 지킨 쭈타누깐과 비겼다. 서든데스제의 세 번째 연장 홀인 14번홀은 둘 다 파. 네 번째 연장 홀의 벙커 샷에서 승부가 결정됐다. 더 까다로웠던 김효주의 샷이 조금 짧았던 반면 쭈타누깐은 홀에 가까이 붙여 파를 지켜냈다.
보기를 범한 김효주의 표정은 밝았다. 경기 후 그는 “선두와 타수 차가 커서 우승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4언더파만 치자고 생각했다”고 했다. 김효주는 쭈타누깐이 1타를 잃은 이날 페어웨이 안착률 93%의 정확한 드라이버 샷과 샌드 세이브 100%(2/2)의 위기관리 능력을 뽐내며 버디만 5개를 뽑았다. 목표보다 1타를 더 줄인 것이다. 김효주는 “연장에서 버디를 잡은 뒤 바로 보기 한 것이 너무 아쉽다”면서도 “지난주 마지막 날(볼빅 챔피언십 6언더파 66타)도 그렇고 이번주도 그렇고 너무 오랜만에 잘 쳐서 기분 좋다. 이 기분을 이어나가서 시즌을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프로 데뷔 전인 2012년에 이미 국내와 일본 프로 대회에서 우승하며 ‘국보소녀’로 불렸던 김효주는 메이저 1승을 포함, LPGA 투어 통산 3승을 올렸지만 2016년 1월 바하마 클래식이 마지막이었다. 올림픽 출전은 불발됐고 지난해 상금 랭킹은 38위까지 떨어졌다. 올 초 “생각지도 않게 일찍 미국에 진출했는데 지난 3년을 돌아보면 힘들었던 기억이 사실 더 많다”고 했던 김효주는 어릴 적 썼던 ‘멘탈노트’를 펼쳐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시즌 중 국내에 들를 때는 오랜 스승인 한연희 전 국가대표 감독과 스윙 교정에 매달렸다. 김효주는 “이번주부터 퍼트가 잘 됐다. 자신감이 올라간 것 같다”고 했다. 이번 대회 라운드당 퍼트 수를 26.75개로 막은 그는 준우승 상금 54만달러를 얻어 상금 6위로 올라섰다.
세계랭킹 1위 박인비는 1언더파 9위, 신인 고진영은 1오버파 공동 17위에 올랐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대표로 나간 김지현(한화큐셀)은 이븐파 공동 10위로 두각을 드러냈다. 한국 선수들은 US 여자오픈 통산 열 번째 우승을 다음으로 미뤘다.
쭈타누깐은 메이저 2승을 포함해 통산 9승째를 거뒀다. 우승상금은 90만달러. 항상 웃는 얼굴과 친절한 태도로 한국 선수들과 팬들에게도 인기가 좋은 쭈타누깐은 이날도 남다른 매너로 눈길을 끌었다. 연장 첫 홀에서 김효주의 플레이에 “나이스 퍼트”라며 응원했다. 경기 후 그는 “나였다면 넣기 어려운 퍼트였다. 들어가는 모습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았다”고 했다.
/양준호기자 miguel@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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