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의 성지인 대구가 격변의 시대를 맞고 있다. 6·13지방선거를 계기로 보수정당에 등을 돌리는 젊은층이 늘고 있다. 대구시민들은 세대에 상관없이 자유한국당에 ‘묻지 마 투표’를 했던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수십년간 굳어진 강한 보수성향이 이번 선거 한 번으로 바뀌지 않을 것이란 반응도 상당하다. 보수의 심장으로 불리는 만큼 노년층에서는 아직 박정희 향수와 박근혜 동정론이 강하다.
진보진영을 지지하는 젊은층과 보수진영을 지지하는 장·노년층이 뒤섞이면서 세대격차는 더욱 뚜렷해지는 분위기다. 진보·보수가 팽팽하게 맞서면서 임대윤 더불어민주당·권영진 자유한국당 대구시장 후보 모두 장담할 수 없는 승부를 가리게 됐다.
◇대구서도 ‘진보’라고 밝히는 청년들=사전투표가 한창 진행되던 지난 8일 대구를 찾았다. 젊은층이 많은 경북대학교와 장·노년층이 많은 서문시장, 대구의 강남으로 불리는 수성구 일대 시민들에게 지역 민심과 지지하는 후보 등을 물었다.
시민들은 대부분 ‘대구가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고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대구에서 나고 자란 이모(34)씨는 “청년들, 20대에서 40대까지는 민주당을 지지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며 “이전과 달리 직장에서나 모임에서나 대놓고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50대 박모씨도 “젊은 사람들은 이제는 대놓고 ‘자신이 진보’라고 이야기한다”며 “작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60대 택시기사도 “최근에는 자식들이 ‘한국당을 뽑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며 “젊은층은 민주당을, 나 같은 60대 이상 노인은 한국당을 지지하는 분위기”라고 털어놨다.
젊은층이 한국당에 등을 돌리기 시작한 것은 이번 선거가 계기가 됐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와 박 전 대통령 탄핵 등을 거쳤지만, 반성하지 않는 보수진영의 모습에 실망했다는 것이다. 동구에 거주하는 직장인 최모(37)씨는 “보수진영에서 비리가 자꾸 터지자 더는 안 된다는 반응”이라며 “이제는 보수라고 표를 주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영업자 김근희(30)씨는 “계속 드러나는 보수의 잘못에 어른들의 말이 틀렸다고 느낀 청년들이 늘어난 것 같다”며 “한 번에 보수가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이번 선거를 통해 보수가 환골탈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文정부 정책에 반기 드는 보수=그러나 보수의 성지답게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판도 상당했다. 특히 박근혜·이명박 두 전직 대통령의 잇따른 구속으로 문재인 정부의 정치보복이 ‘도를 넘었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서문시장에서 만난 70대 상인 장모씨는 “문재인 대통령이 박근혜를 구속하려고 이것저것 걸고넘어지 않았느냐”며 “박 전 대통령만 불쌍하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장씨의 이야기를 듣던 또 다른 상인은 “(문 대통령도) 똑같이 당해야 한다”며 날을 세우기도 했다.
주부 김모(62)씨는 “최저임금도 그렇고 자꾸 퍼주는 정책만 하는데 그 세금을 누가 내느냐”며 “대통령이 세금을 마음대로 쓰는 데 심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연이은 남북·북미정상회담에 대한 기대감과 달리 한반도에 위기가 올 것이라는 우려도 터져 나왔다. 주부 신모(59)씨는 “이대로 가다가는 김정은이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는 것 아니냐”며 “대통령의 안보관이 불안하다”고 꼬집었다.
보수성향 유권자들은 권 후보가 재선 시장이 돼 정부를 견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30년 넘게 택시를 모은 김씨(64)씨는 “김부겸 장관이 대구에서 당선돼 기대했는데 대구가 달라진 게 없다”면서 “권 후보가 특별하게 잘한 것도 없지만 4년간 무난하게 시정을 이끌었다”고 말했다.
후보에 대한 비판도 잇따랐다. 임 후보의 경우 인지도가 낮고 후보의 특징이 뚜렷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김씨는 “임 후보가 문 대통령과 김부겸 장관만 강조하다 보니 지난 총선 때 ‘친박 감별사’를 연상하게 해 거부감이 든다”고 말했다. 권 후보의 경우 ‘할리우드 액션’으로 반감이 커졌다고 지적했다. 지난 유세 도중 골절상을 입고 입원해 할리우드 액션이란 비난을 산 바 있다. 시민 대부분 권 후보의 이 사건을 계기로 등을 돌리게 됐다고 입을 모았다.
/류호기자 rh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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