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그 앞은 격동의 우리나라 역사를 품고 있는 곳으로 그 자체가 역사서다. 지난 4월 문화재청과 서울시는 광화문 앞 일대를 역사광장으로 조성하면서 사라진 월대를 복원하고 해태상을 원위치로 이전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완전할 수는 없겠지만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다는 소식에 반가웠다. 특히 해태상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관악산의 화기(火氣)로부터 경복궁을 지키기 위해 세웠다는 설이 있기 때문에 소방관으로서 남다른 감회가 들었다. 해태상은 과거 일제가 좌대와 분리해 거적을 뒤집어씌우고 구석에 방치한 적도 있으며 다시 문밖으로 나오기는 했으나 아직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해태상을 세운 이유가 방화 의식에서 비롯됐다는 이야기처럼 이것 말고도 한양도성 내 여러 곳에서 방화와 관련된 조치를 찾아볼 수 있다. 조선이 한양을 도읍으로 건설하면서 중요시한 것이 풍수라고 한다. 풍수적 관점에서 한양의 지세는 남쪽에 위치한 관악산의 화기를 눌러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고 한다. 풍수적으로 약한 부분을 보완해주는 조치를 ‘비보풍수(裨補風水)’라고 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숭례문 앞에 있던 연못 ‘남지(南池)’다. 단순히 생각해도 연못에는 물이 많으니 불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다. 남지의 모습은 지난 1629년에 그려진 그림 ‘남지기로회도(南池耆老會圖)’를 비롯해 여러 문헌과 지도에 기록돼 있으며 1896년 독립신문의 기사에도 등장하니 건설된 후 몇백년을 존속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남지는 비보풍수라는 것 외에도 방화수로 사용되거나 조경기능이 있어 실용적 가치가 높았을 것이다. ‘남지기로회도’를 보면 연못가에는 수양버들이 늘어져 풍취를 더하고 연못 안에는 연꽃이 가득해 매우 아름다운 모습이었을 것임이 충분히 짐작된다. 그리고 때때로 물새들이 날아와 쉬고 가는 곳이니 상상만으로도 평온한 느낌이 가득 전해온다.
그러나 이런 남지가 어이없게도 1907년 사라졌다. 당시 일본 요시히토 황태자 방문을 구실로 길을 낸다면서 메워버린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1926년 일본회사가 건물을 짓기 위해 터파기를 하던 중 중요한 유물이 한 점 발견된다. 몸통은 거북이고 머리는 용인 ‘청동용두거북’이 출토됐고 그 속에서는 팔괘도가 발견됐다. 불 화(火)자를 팔괘와 물 수(水)자가 둘러싸고 있는 형태다. 남지가 화재를 막고자 하는 방화의식과 관련돼 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라도 보여준 증거물이다. 1997년 경회루 연못 준설과정에서 출토된 ‘청동용’과도 맥이 통하는 유물이다.
숭례문이 방화의 참화를 겪은 지도 어언 10년이 지났다. 숭례문은 다시 섰지만 일제가 없애버린 남지에는 현재 초라한 표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연꽃과 햇살이 가득한 연못이 복원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숭례문에 묻게 된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