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 규모의 한 주거용 부동산 관리업체에서 일한 A(49)씨는 13년 전 필리핀 국적의 아내와 결혼했다. 그는 초등학교 6학년과 4학년인 첫째·둘째뿐 아니라 태어난 지 1년밖에 안 된 늦둥이를 보는 재미로 직장생활의 피로를 잊어왔다. 한국어가 서툰 아내를 대신해 아이들의 학교 준비물을 살뜰히 챙기거나 선생님과 통화하며 아이들 지도를 부탁하는 것도 A씨 몫이었다.
A씨는 지난달 24일 업체 소속 관리사무소장 B(70)씨로 부터 25층 아파트 옥상에 올라 가보라는 지시를 받았다. 평소 이 아파트에서 보일러 수리와 전기 공사 등 설비·전기 관리 업무를 담당한 그는 영문도 모르고 전혀 해보지 않았던 무동력 환풍기 교체 작업이 맡겨졌다.
추락에 대비한 로프 등 안전 장비는 전혀 없었다. 맨몸으로 동료 2명과 함께 옥상에 올랐다. A씨는 무방비 상태로 붉은색 벽돌이 층층이 깔린 옥상 내 비탈 위에서 교체할 환풍기를 살폈다. 동료들과 줄자로 환풍기 둘레를 재고서 휴대전화로 사진도 찍었다. 환풍기를 살펴보던 A씨는 비탈 위에 올라섰다가 그만 발을 헛디뎠다. 60m 높이 25층 아파트 옥상에서 추락한 그는 지상에 주차된 차량 위로 떨어져 그 자리에서 숨졌다.
A씨 유족들은 그동안 해왔던 업무가 아닌데도 안전 장비 하나 없이 작업을 지시한 회사 측에 대해 분통을 터뜨렸다. A씨의 조카는 20일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외삼촌의 막내 늦둥이 돌잔치가 이번 주 토요일(23일)이었다”며 “삼촌 혼자 벌어 외숙모와 3명의 조카를 돌봤는데 안타까운 사고로 돌아가시면서 생계가 막막한 처지에 놓였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어 “외삼촌은 오전 9시에 출근해 다음 날 오전 9시 30분까지 24시간 넘게 일을 하는 2교대 근무자였다”며 “회사는 전혀 해본 적 없는 고층 작업을 시켜놓고도 몸을 묶는 로프 하나 지급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해당 업체 관계자는 “평소에도 직원들에게 안전교육을 하고 있다”며 “당시 사고에 관해서는 해당 직원이 경찰에서 모두 진술했기 때문에 더 언급할 게 없다”고 밝혔다.
경찰은 안전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고 옥상 작업을 지시한 B씨를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의뢰한 A씨 부검 최종 결과가 도착하는 대로 B씨를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할 방침이다. 경찰 관계자는 “B씨는 고층 건물에서 작업하도록 지시하면서도 안전 장비를 지급하지 않고 관리·감독 업무를 소홀히 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최근 10년(2007년∼2016년)간 총 93만1,000여건의 산업재해가 발생해 1만9,242명이 사망했지만 사고 책임 관련자 대부분은 벌금형을 선고받는 데 그쳤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현재 산업재해와 관련해 업무상과실치사나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기소되면 대부분 벌금형을 받는다”며 “산업재해가 발생한 사업장 측의 처벌을 강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서영인턴기자 shy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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