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5월24일 부산항에 상륙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한양·개성을 거쳐 불과 한 달 보름여 만에 평양성까지 함락시켰다. 하지만 네 차례의 전투 끝에 이듬해 2월 조선·명 연합군의 공격에 병력 1만8,000여명의 3분의2를 잃고 퇴각한 고니시는 전선을 한양까지 물렸다. 그가 전열을 재정비한 곳은 지금의 서울 용산구 원효로4가 일대. 한강이 가까운데다 북쪽으로는 북한산과 남산이 버티고 있어 더없이 좋은 전략적 요충지라는 판단에서다. 용산 일대를 군사 요충지로 생각한 것은 고니시만이 아니었다. 앞서 고려 시대 말이던 13세기에는 한반도를 침입한 몽골군이 병참기지로 활용했고 1882년 임오군란 당시에는 청나라 병력 3,000명도 이곳을 주둔지로 삼았다.
천혜의 입지 때문일까. 일제강점기는 물론 광복 후 지금까지 용산은 외국군 주둔지로 이용돼왔다. 러일전쟁을 앞둔 1904년 일본은 용산 일대 300만평의 땅을 헐값에 강제수용해 이 중 115만평을 병영으로 활용했다. 1945년 광복에도 이 땅은 주인만 바뀌어 여전히 외국군 부지로 활용됐다. 한반도 내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일본 오키나와에 있던 미 24군단 소속 7사단이 그 자리를 채웠기 때문이다.
미군은 1950년 초 잠시 용산을 떠나기도 했다. 태평양 방위선인 ‘애치슨라인’에서 한국이 제외되면서 부대를 철수하고 일부 고문단만 남겼다. 하지만 6·25전쟁 휴전과 함께 용산에 재주둔했고 1957년에는 미군 사령부가 배치되면서 미군기지 시대가 본격화했다. 이후 용산 미군기지는 삼각지사거리와 이태원 사이 도로 남북 80만여평의 부지에 대규모의 군부대 시설과 주거·지원 시설을 형성했다.
용산 미군기지는 주변 경제에도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 초반 부평에 있던 121후송병원이 용산 미8군 영내로 이전하면서 부평의 기지촌 상인이 함께 이태원 일대로 이주해오며 대규모의 상권을 형성했다. 특히 이태원은 일대 상권이 값싸고 특색 있는 보세물품을 살 수 있는 쇼핑가로 성장하며 ‘서울 속의 외국’으로 유명해졌다.
오는 29일 주한미군 사령부와 유엔군 사령부가 경기 평택 미군기지로 옮겨가면서 73년간 이어져온 용산 미군기지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됐다. 1904년 이후 줄곤 외국군 주둔지로 사용된 것을 감안하면 114년 만이다. 서울시민들의 품으로 되돌아올 용산의 새 모습이 기대된다.
/정두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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