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의료기기를 마중물 삼아 규제혁신에 드라이브를 걸고 나섰다. “많은 노력을 기울여 개발된 의료기기들이 규제의 벽에 가로막혀 활용되지 못한다면, 절실한 환자들이 사용할 수 없게 된다면, 누구를 위한 규제이고 무엇을 위한 규제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도 했다.
옳은 지적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이 의료기기 허가 과정의 규제 간소화 틀을 벗어나지 못한 것 아닌지 우려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규제혁신을 의료기기 사용자인 환자와 국민, 허가를 받아야 하는 의료기기 업체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면 국민건강을 저해하고 의료비 상승을 부추기는 또 다른 불합리한 규제의 한 축은 간과된다. 의사는 되고 한의사는 안 되는 불공정한 ‘규제의 이중잣대’다.
한의사들은 한의대에서 해부학·진단학·영상의학 등을 배우고 질환 관련 의료기기 실습도 한다. 한의사 자격시험인 국가고시에는 컴퓨터단층촬영(CT), 자기공명영상(MRI)을 판독하는 문제가 네 개나 출제되기도 한다. 한의대와 의대의 교육과정은 75% 이상 일치한다.
이런 교육과정을 거쳐 국가면허를 받은 의료인인 한의사가 의료기기를 사용하는 것은 정확한 진단·진료와 데이터 축적을 통한 한방의 과학화에 필수적이다. 중국에서는 우리나라의 한의사 격인 중의사가 의료기기를 사용해 정확한 진단·치료를 하지 않으면 제재한다. 한의사들은 또 의사와 똑같은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KCD) 코드에 따라 진단하고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건강보험 급여 지급을 청구한다.
한의원에 염좌 증상으로 내원한 환자가 뼈에 이상이 있는지 확인하려면 정형외과 의원이나 X선 장비가 있는 병원에서 영상진단을 받아와야 한다. 초진 진료비는 별도다. 이런 장비가 있는 한방병원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대다수 한의원의 현실은 그렇다. 그래서 환자를 뺏기기 일쑤다.
한 대형 한방병원에서는 한의사들이 의료기사가 찍은 X선·MRI 영상 등을 띄워놓고 진료한다. 이들 의료기기와 의료기사의 안전관리 책임자는 의사다. 한의사는 의료영상을 판독하고 진료할 따름이다. 실질적인 안전관리 책임자는 의사를 고용한 한방병원장, 즉 한의사지만 안전관리 책임자가 되지는 못한다. 한 편의 코미디다.
간·갑상선 등에 생긴 초기 암 가운데 크기가 작고 숫자가 적으면 바늘 모양의 고주파 전극을 찔러넣어 종양을 태워 죽이는 고주파 열치료를 하는 것이 일반화하고 있다. 의사들은 전극이 종양을 제대로 찔렀는지 확인하기 위해 초음파 영상 등을 활용한다. 그런데 한의사가 무릎 관절 등에 약침을 놓을 때 초음파 기기를 쓰면 ‘불법’이다. 한의사에게만 ‘눈대중 치료’를 강요하는 셈이다.
적잖은 의사들은 한의사가 의료기기를 사용해서는 안 되는 이유로 ‘한방 치료의 원리에 부합하지 않는다’거나 ‘한의대에서 제대로 교육받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또 ‘한방 치료는 표준 진료 지침조차 없어 한의사마다 치료 방법이 다른 경우가 많고 과학적 근거(임상시험 데이터)가 부족하다’고 비하한다. 그러나 불합리한 의료기기 사용 규제를 푸는 것이 한방 과학화의 지름길이자 국민건강을 위하는 길이라는 사실은 애써 외면한다.
보완·대체의학 관련 국제학술지에는 우리보다 훨씬 많은 중국 중의사들의 논문이 실린다. 논문의 기본은 의료기기로 측정한 수치 데이터다. 한의사에 대한 의료기기 사용 규제는 의사들의 상대적 경쟁우위를 유지시키는 불공정한 방패이자 한방 의료의 국제경쟁력을 갉아먹는 암적 존재다.
그런데도 줄기차게 유지되고 있는 것에는 의사들에게 휘둘려온 보건복지부를 포함한 정부의 책임이 가장 크다. 국회도 자유로울 수 없다. 대다수의 국민은 한의사의 의료기기 사용에 찬성한다. 정부는 의료기기 허가상의 규제 간소화 못지않게 한의사와 한방 의료기관 이용자를 차별하는 불합리한 규제 혁파에 나서야 한다. 의료기기 업계에 상당한 시장 확대와 일자리 창출 효과도 가져올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적폐를 청산할 의지가 있는가. /임웅재 보건의료선임기자 jaeli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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