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일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만비키가족·26일 개봉), 지난해 수상작인 스웨덴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의 ‘더 스퀘어’(The Square·8월2일 개봉)는 칸 영화제의 대미를 장식했다는 점 외에도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신뢰와 연대가 무너진 세상에서 인간의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 무엇보다 해외 영화제 수상작들이라면 으레 무겁고 난해하다는 편견을 단박에 깨부수고 유쾌한 웃음 속에 묵직한 주제의식을 담아냈다는 점이 그렇다.
극명한 차이도 있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 관객과 영화의 관계 맺는 방식이다. 동양 감독인 고레에다가 스토리텔링 중심으로 주제를 풀어내며 관객과 캐릭터의 강한 유대를 만들어낸다면 외스틀룬드는 구조와 상징을 중심으로 주제 의식을 드러내며 관객을 철저히 사각 틀 밖의 관조자로 머물게 한다. 맥락·유대·완곡화법으로 대변되는 동양, 구조·개인·직설화법으로 설명되는 서양식 세계관의 차이를 비교하며 두 영화를 감상하는 것도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라는 얘기다.
◇고레에다 월드의 완결판 ‘어느 가족’=“더없이 소중하지만 성가신 존재”로서 가족의 의미를 끊임없이 탐구했던 고레에다 감독의 가족 시리즈 완결판이라 할 만한 작품이다. 영화는 할머니 하쓰에(기키 기린)의 연금과 좀도둑질(만비키)로 살아가는 한 가족이 친부모의 학대로 집을 나온 작은 소녀 유리(사사키 미유)를 거두게 되면서 시작된다. 낡고 좁은 목조주택에서 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겉보기엔 할머니와 부부, 여동생과 아들로 구성된 가족처럼 보이지만 피가 섞인 가족이라기엔 이들의 대화는 어쩐지 수상하다. 하쓰에를 제외하곤 저마다의 사연으로 신분을 감춘 채 살아가는 증발자들. 만비키 가족의 일원인 소년 쇼타(죠 가이리)가 도둑질을 하다 막내 유리를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경찰에 붙잡히면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 가족의 정체가 밝혀지고 결국 병원과 보호시설, 교도소와 진짜 가족의 품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고레에다 월드의 완결판이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영화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 등에서 다뤘던 가족의 의미, ‘아무도 모른다’에서 보여줬던 도시 빈민과 가족 방치의 문제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연금이든 성매매든 좀도둑질이든 각자의 방식으로 가족의 생계에 보탬이 돼야 하는 만비키 가족의 모습은 세상의 눈으론 범죄집단이며 가족을 구성하는 성인들은 아동학대범들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세상의 눈으론 진짜 부모에게 학대당하는 유리를 누구도 구원할 수 없다. 만비키 가족을 ‘진짜 가족’으로 이어주는 것은 각자가 가슴 깊이 가진 학대와 소외의 상처들, 그리고 이를 통해 나눠 갖는 연민이다.
잔잔한 휴먼 드라마로 감동과 웃음을 주면서도 감독의 날카로운 시선이 머무는 곳은 부자나라 일본의 가난한 국민들이다.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그리 멀리 있지 않음을,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이들의 이야기를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박제된 정의’ 정조준한 ‘더 스퀘어’= ‘어느 가족’이 시종일관 사각 스크린의 경계를 허무는데 치중한다면 ‘더 스퀘어’는 스크린 속에 또 하나의 사각 틀을 만들어 관조자(영화 속 캐릭터)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관조자(관객)라는 이중 구조를 만들어낸다. 이를 통해 얻는 효과는 역설적이게도 객관적인 자기 성찰이다.
주인공은 ‘더 스퀘어’라는 제목의 새로운 전시를 앞둔 스톡홀름 현대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크리스티안(클라에스 방)이다. 출중한 외모와 능력을 갖춘 것은 물론 걸인에게 음식을 사줄 정도로 적당한 선행을 베풀며 살아가는 그는 ‘정치적 올바름’으로 중무장한 유럽 지식인의 전형이다. 그러나
출근길에 소매치기를 당하고 괴짜 같은 여기자와 질긴 인연이 시작되면서 그의 삶은 엉망이 되고 완벽해 보였던 그의 위선이 드러나게 된다.
실제 외스틀룬드 감독이 스웨덴에서 기획했던 전시이자 극 중 크리스티안이 기획한 전시 ‘더 스퀘어’는 가로×세로 4m의 공간을 ‘신뢰와 배려의 성역’ ‘모두가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나눠 갖는 공간’으로 설정, 상호 신뢰와 연대의 경험을 확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도난당한 휴대폰과 지갑을 되찾기 위해 협박성 편지를 불특정 다수에게 돌리고, 곤경에 처했을 땐 부하 직원을 앞세우고 뒤로 숨어버리는 크리스티안의 모습에선 상호신뢰와 연대도, 정의도 찾아볼 수 없다. 예술은 개인을, 공동체를 구원할 수 있을까. 이 영화는 ‘박제된 정의’를 스퀘어(스크린 혹은 극장) 밖 세상의 ‘진짜 정의’로 끌어낼 수 있는지 묻고 있다.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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