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소야대의 다당제는 국민들이 만들어준 20대 국회의 숙명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야당과의 협치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문재인 정부의 가장 큰 숙제입니다. 집권 2년차로 접어든 문재인 대통령이 민생경제와 개혁입법 등 산적한 현안을 풀고자 한다면 국민을 대표하는 입법기관인 국회를 존중하고 야당과도 수시로 만나 설득해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이 있듯이 지금이야말로 협치의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대담=서정명 정치부장 vicsjm@sedaily.com
문희상 국회의장은 31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창간기념 특별인터뷰에서 “문재인 정부가 높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6·13지방선거를 승리로 이끄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대통령의 대표 공약인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를 비롯한 여러 개혁입법 처리는 성과가 전무하다”며 “결국 국회의 협조 없이는 국정 개혁과제들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문 대통령과 청와대가 직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촛불혁명의 힘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지금까지는 높은 지지율을 이어가고 있지만 국회 차원의 입법작업이 뒷받침되지 않을 경우 향후 국정운영 동력이 급격히 떨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문 의장은 이날 한 시간 넘게 진행된 인터뷰에서 입법부의 수장이자 대한민국 정계의 원로로서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한 애정 어린 조언들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문 의장은 노무현 정부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내며 당시 민정수석이던 문 대통령과 함께 호흡을 맞춘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기대감을 피력하면서도 실책과 아쉬운 점에 대해서는 죽비를 들었다. 세간의 별명처럼 ‘포청천’의 이미지가 여실히 묻어났다.
입법작업 뒷받침 안되면 국정운영 동력 급격히 상실
대통령이 국회 존중하고 야당 설득하는 모습 보여야
개혁과제 협치 필수..명분·절차·타이밍 ‘3박자’필요
그 누구보다 현 정부의 성공을 바라는 문 의장이 문 대통령에게 적극적인 협치의 자세를 주문하고 나선 것은 여소야대의 다당제 구도 속에 국회의 상황이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집권여당의 의석수(129석)가 과반에도 한참 못 미치는 여건에서 야당의 협조를 이끌어내지 못하면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각종 국정과제들은 국회 문턱조차 넘기 어려운 현실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문 의장은 국회의장 취임사에서도 “후반기 국회 운영의 목표는 첫째도 협치, 둘째도 협치, 셋째도 협치”라며 입이 닳도록 협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문 의장이 인터뷰하는 동안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 역시 ‘협치’였다.
“결국 협치는 정치로 풀어가야 합니다. 다만 정치적 연대가 성공하려면 세 가지 원칙을 갖춰야 해요. 우선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대의명분이 있어야 하고, 절차적 투명성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여야 정치 상황이 맞아떨어지는 타이밍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지금은 대통령과 여야 모두 협치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어요. 대통령이 협치의 손을 내밀면 야당도 그 손을 잡게 될 것입니다.”
문 의장은 최근 정치권에서 거론되고 있는 이른바 ‘협치 내각’에 대해서도 높은 기대감을 보였다. 그는 “집권 2년차를 맞은 청와대와 여당 모두 필요성이 더 커지면서 실현 가능성은 100%라고 본다”며 “성공적인 협치를 위해 청와대와 야당 사이의 다리를 놓는 게 내 역할”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겸손했고 언격(言格)은 높았다. 다만 협치 내각의 범위를 특정 진영으로만 국한해서는 안 된다는 게 문 의장의 협치 구상이다. 문 의장은 “어렵더라도 제1야당과 하는 게 진짜 협치의 모습”이라며 “호랑이를 그리려고 해야 고양이라도 그릴 수 있듯이 범보수 진영까지도 아우를 수 있는 열린 자세로 협치 내각을 구성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문 의장은 문재인 정부를 뒷받침하는 양축인 청와대와 여당을 향한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그는 “청와대가 오만함에 빠져 독선과 아집의 정치를 하는 순간 국민들은 귀신처럼 바로 알아챈다”면서 “특히 국민의 뜻을 대표하는 국회를 무시한 채 여론만 쫓아가는 것은 민주주의의 본질을 흔드는 위험한 발상”이라고 꼬집었다.
집권여당이자 본인의 친정이기도 한 더불어민주당에는 ‘맏형 리더십’을 주문했다. 국회의장에 취임하면서 무소속이 된 문 의장은 “친정집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월권이지만 그래도 친정이 잘 되면 어깨가 으쓱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8월 말 새로 선출될 민주당 차기 지도부에 대한 당부를 이어갔다.
“3권분립의 원칙에 따라 행정부를 견제하고 비판하는 일은 입법부의 몫입니다. 여당 역시 마찬가지예요. 여당이 청와대의 거수기나 정권의 시녀 노릇을 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특히 여당은 마치 ‘가난한 집안의 맏아들’ 같은 무거운 책임감도 가져야 돼요. 동생(야당)을 윽박지르고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못난 형이나 다름없어요. 동생을 잘 다독여가면서 집안(국회)을 잘 이끌어가는 게 여당의 책무입니다. 물론 야당도 오로지 반대를 위한 반대나 발목잡기만 고집해서는 국민의 외면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문 의장은 ‘일하는 국회’를 만들기 위한 구상도 밝혔다. 그는 국회의장 당선 공약으로 ‘통합과 협치의 실천’과 함께 ‘일 잘하는 실력 국회’를 내건 바 있다. 문 의장은 “현재 대통령에게 지나치게 집중된 권력을 나누자는 데는 모두 동의하면서도 정작 권력분산이 쉽지 않은 것은 국회가 국민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라며 “잃어버린 국민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 잘하는 국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 의장이 구체적인 해법으로 제시한 것은 소위원회 활성화와 법안소위 정례화다.
“미국 의회는 소위원회를 중심으로 수시로 청문회를 열고 중요 안건을 논의합니다.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 동아시아태평양소위원회의 프레이저 전 위원장은 우리도 모두 기억하고 있을 정도죠. 하지만 우리 국회는 정치적 공방만 벌이느라 사실상 소위가 유명무실한 실정입니다. 잠자는 소위를 활성화해 24시간 깨어 있는 국회로 만들겠습니다.”
이를 위해 문 의장은 대부분 비공개로 열리던 소위를 외부에 공개하고 중요한 안건의 경우 TV 생중계를 통해 온 국민이 시청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 또 소위원장에게는 권한을 대폭 부여해 소위의 위상을 높이겠다는 계획이다. 아울러 각 상임위별로 계류된 법안을 심사하는 법안소위를 일주일에 한두 차례씩 열리도록 정례화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국회 사무처는 문 의장의 지시로 국회법 개정 여부도 검토하고 있다. 문 의장은 매주 월요일마다 열리는 국회의장과 원내 교섭단체 대표 간의 정례회동도 좀 더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있게끔 사전에 회의 안건을 미리 정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소위 활성화·법안소위 정례화로 일하는 국회 만들것
개헌 논의 지금이 적기..연내 여야 합의안 도출 가능
김병준號, 깃발만 제대로 들면 보수당 부활할 수도
문 의장은 연내 국회 차원의 개헌안 마련 의지도 거듭 강조했다. 문 의장은 20대 후반기 국회의장에 선출된 직후 “올해 안에 여야가 합의한 개헌안을 만들어내겠다”며 대통령 개헌안 처리 불발 이후 사그라진 개헌 논의에 다시 불을 지핀 상태다. 국회의장의 개헌 군불 때기에 야당들은 일제히 반색했지만 여당은 “민생개혁입법 처리가 우선”이라며 다소 신중한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개헌안의 핵심 쟁점인 권력구조 개편을 둘러싸고 여당은 대통령 4년 중임제와 권한분산을 내건 반면 야당은 국회의 총리선출제를 주장하며 맞서고 있다. 이에 대해 문 의장은 “비록 국회 처리가 불발되기는 했지만 문 대통령은 본인의 대선 공약을 지키기 위해 정부 개헌안까지 발의하면서 사실상 개헌에 관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셈”이라며 “이제 공은 국회로 넘어왔다”고 말했다.
“대통령 개헌안이 국회에서 폐기 처리됐다고 해서 개헌 논의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국회가 논의를 주도해야 할 때죠. 어차피 개헌을 하려면 국회의원 3분의2 동의가 있어야 하는 문제예요. 국회에서 여야가 합의만 이룬다면 대통령도 막을 재간이 없어요. 지금 국회에는 이미 여야가 상당히 접근한 개헌안이 있어요. 올해 안으로 충분히 여야 합의안을 만들 수 있습니다.”
문 의장은 권력구조 개편을 둘러싼 절충안으로 특검처럼 여야가 복수 추천한 총리 중 한 명을 대통령이 임명하거나 책임총리제 실현을 위해 총리의 국무위원 해임 건의나 제청권을 보다 확실히 보장해주는 방안 등을 제시했다. 그는 “심지어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은 협치의 의미로 내각 구성권을 야당이 가져가라고까지 했다”며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지낸 문 대통령이 그것을 모를 수 없을 것”이라면서 여야가 허심탄회하게 논의하면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개헌 논의가 시작되면 정국의 모든 이슈를 집어삼키는 ‘블랙홀’이 될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서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며 “오히려 당장 눈앞에 닥친 선거가 없는 지금이야말로 개헌의 적기”라고 반박했다.
화제를 돌려 최근 자유한국당의 재건을 이끌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임명된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에 대해 물었다. 김 비대위원장은 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자문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장과 청와대 정책실장, 교육부총리 등을 지낸 ‘친노(노무현계)’ 인사 중 한 명이었다. 문 의장이 대통령 비서실장을 그만둔 뒤 김 비대위원장이 정책실장으로 오면서 청와대 안에서 함께 호흡을 맞춘 적은 없지만 둘은 그로부터 14년이 흘러 국회의장과 제1야당의 구원투수로 여의도에서 다시 만난 셈이다.
문 의장은 최근 김 비대위원장과 만난 자리에서 “보수의 깃발이 애매하고 기수가 엉터리면 보수 자체는 궤멸할 수밖에 없다”며 “그래도 보수의 새로운 기수에 최소한 노무현 정신을 아는 당신이 제1야당 대표가 된 게 다행이라고 얘기를 했다”고 전했다. 그는 “보수의 핵심 가치는 책임이 따르는 자유인데 일부에서 잘못된 깃발을 들고 극우주의로 흘렀던 게 문제였다”면서 “그런 측면에서 자유주의의 기치를 강조한 김 비대위원장의 기본 착안은 좋았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지방선거를 통해 일시적으로 보수세력이 궤멸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보수의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은 전체의 30%에 달한다”며 “기수가 욕을 먹으니 깃발까지 없어진 건데 보수의 깃발만 제대로 들어 올린다면 보수층이 요원의 불길처럼 살아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그는 인터뷰 내내 ‘긍정’을 얘기했다. 부정의 바이러스를 언급하지 않았다. 문 의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강조했던 것처럼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정리=김현상·하정연기자 kim0123@sedaily.com 사진=권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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