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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민 "맨몸보다 치밀한 구강액션…애드리브 생각할 틈 없었죠"

[영화 '공작'서 스파이 '흑금성'으로 열연]

총격전 없이 말로 긴장감 높이려면

철저한 계산 없인 장면소화 쉽잖아

카메라 꺼지면 대사 복기하기 바빠

배우로서 바닥치고 올라갈 때 느껴

육군 정보사 출신의 대북 사업가 박석영으로 신분을 감춘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요원 흑금성(황정민)과 북한 외화벌이를 책임지는 베이징 소재 고위 간부 리명운(이성민),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과장 정무택(주지훈)이 베이징 소재 한 중식당의 원탁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북한 핵무기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고위직 간부의 신뢰를 얻으려는 자와 끊임없이 그를 테스트 하려는 자. 말로 주고 말로 되받는 이른바 ‘구강 액션’은 그 어떤 액션 장면보다 쫄깃하고 팽팽하다.

최근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황정민은 “맨몸 액션보다 더 치밀하게 계산한 구강 액션으로 긴장감과 에너지를 전달하는데 배우와 스태프 모두 치밀하게 준비하고 촬영에 임했다”며 “애드리브 한 마디 끼워 넣거나 눈알 한번 굴리기는커녕 카메라 라이트가 꺼지면 마치 학창시절 연기연습을 할 때처럼 다들 벽을 보고 정해진 대사와 움직임을 복기하기 바빴다”고 회고했다.





올해 칸 국제 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에서 첫선을 보이며 “총보다 더 강한 말의 액션”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공작’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당시 대선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해 안기부가 주도한 북풍 사건을 바탕으로 한 첩보 스릴러다. 흑금성이 북한 고위층에 접근하기 위해 북측 고위 인사에게 공동 사업을 제안하고 급기야 김정일 국방위원장까지 만나 남북 공동 광고사업을 성사시키는 과정 등 대부분이 실화에 기대고 있다.

올 초 10년 만에 셰익스피어 희곡 ‘리차드 3세’로 연극 무대 귀환을 선언하며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어 무대에 오른다”던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지난해 1월부터 7월까지 이어졌던 ‘공작’ 촬영이 분명 결정타였다.

“윤성빈 감독이 저를 주인공으로 첩보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고 기획 초반에 캐스팅 제안을 했어요. 내가 분명 편안하게 살았던 1990년대에 이런 대북 공작이 있었고 그 주인공이었던 남측 공작원이 결국 정쟁에 희생돼 국가보안법 적용을 받고 복역했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적이었고 몰랐던 제가 부끄러웠죠. 바로 출연 제의를 수락하고 대본도 열심히 외우고 준비했는데 첫날 촬영에 가보니 준비한 게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겉으론 상대를 속이면서 인물의 내면을 관객들에게 알려줘야 하니 이중, 삼중의 계산이 필요했죠. 말과 침묵의 배합으로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선 상대 배우와 철저한 계산으로 장면을 소화해야 했어요. 한 달을 끙끙 알았는데 나중에 알게 됐죠. 나만 힘든 게 아니었단 걸. 그때부터 서로 도와달라고 애원하면서 찍었죠. ‘내가 관성으로 연기하고 있었구나. 바닥을 치고 다시 올라가야 할 때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화려한 액션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추격전이나 총격전도 없지만 주인공들이 만들어낸 서스펜스는 스크린을 넘어 객석을 얼어붙게 한다. 황정민은 “상 밑에서는 날 선 칼이 마구 오가는데 내뱉는 말은 전혀 다른 그 상황을 긴장감으로 버무려내기까지 윤 감독의 집요함과 예민함이 큰 역할을 했다”며 “눈의 동공까지 담아내는 클로즈업 촬영이 많아서 당시엔 의아했는데 영화를 보면서 ‘윤 감독은 어떤 장면을 만들지 머리 속에 다 들어 있었구나’ 깨달았다”고 털어놨다.

황정민이 연기한 흑금성은 실존 인물 박채서 씨. 1990년대 대북 비선요원으로 북한 최고위 층을 상대로 공작업무를 했던 박 씨는 북한에 군사 정보를 넘겨준 죄로 징역 6년 형을 받고 지난 2016년 만기 출소했다. 황정민은 본격적인 영화 촬영 전 그의 에너지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만남을 청했다고 한다.





“윤 감독은 박채서 선생을 보자마자 저를 떠올렸다고 하는데 저는 눈에서 감정을 전혀 읽을 수 없는, 엄청난 에너지를 가진 박 선생을 보고 정말 묘한 기분이 들었어요. 어떻게 에너지를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죠. 이 영화는 한 사람의 억울한 사연을 밝히자는데 그치는 영화가 아닙니다. 언제든 선량한 시민이 국가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기획이 무르익던 시기는 박근혜 정부 당시 반정부 성향의 문화예술계 인사들에 대한 지원을 배제하는 이른바 ‘블랙리스트’가 공공연하게 알려지며 영화계도 꽁꽁 얼어붙었던 때. 더욱이 크랭크인 당시는 탄핵 정국에 남북 관계도 얼어붙어 남측 스파이와 북한 고위 인사의 경계를 뛰어넘는 우정을 그려낸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당연히 북한 현지 촬영은 꿈도 꿀 수 없었고 영화 속에 실감 나게 그려진 김정일 별장이나 평양 시내 모습은 세트 제작과 자료 영상으로 메워야 했다. 200억 원에 달하는 제작비가 투입된 이유다. 이미 촬영을 마치고 한참이 지난, 올 4월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윤 감독과 배우들은 쉴새 없이 휴대폰 문자를 주고받으며 감격을 나눴다고 한다.

“판문점에서 남북 정상이 만나는 장면의 앵글과 동선까지 모든 게 우리 영화랑 너무 닮은 거예요. 두 정상이 영화를 미리 봤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우리끼린 조금만 기다렸다가 평양 가서 찍을 걸 괜히 세트 짓느라 애먹었다는 농담도 할 정도였죠. 무엇보다 가슴을 쓸어내렸어요. 우리가 영화에서 그린 이야기가 지금 한반도 현실과 맞닿아있으니까요.”

칸 상영 당시 찬사가 이어진 가운데서도 황정민은 아쉬움이 컸다고 한다. “분단국가의 현실을 세포까지 온전히 느끼고 있는 한국 관객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해졌기 때문”이다. 8일 개봉.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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