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들이 하는 짓이 다 싸움 뿐이죠. 해변에나 가서 잊어 보렵니다.”
맬컴 턴불 호주 총리가 24일 사임하자 호주 솬더스 비치의 택시 운전사는 이같이 말했다. 턴불 총리의 사임으로 호주 국민들은 10년간 총 6명의 총리를 보게 됐다. 1983년주터 2007년까지 단 3명(봅 호크, 폴 키팅, 존 하워드)의 총리만 봤던 호주 국민들에게 최근의 정치 상황은 말 그대로 ‘카오스’다. 외신들은 호주 정치권이 계파 갈등이 생길 때면 총리를 쫓아내는 나쁜 버릇이 들었다고 꼬집는다. 권력 다툼 속에 개혁 정책 처리는 잇따라 무산돼 국민들의 한숨은 깊어가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집권 자유당이 이날 의원 총회를 열어 스콧 모리슨 장관을 차기 당 대표로 선출했다고 이날 보도했다. 호주는 내각책임제로 하원 다수당 대표가 총리직을 맡는다. 지난 21일 당내 의원 과반수의 요구로 대표 불신임 투표를 한 차례 겪었던 턴불 총리는 다시 의총이 소집되면 경선에 나가지 않겠다고 공언했고, 이날 실제로 의총 개최가 결정되자 사임을 발표했다.
총리 교체의 표면적인 이유는 턴불 총리의 환경·이민 정책에 대한 반발이지만 핵심은 집권을 위한 이합집산으로 분석된다. 자유당 내 보수파는 턴불 총리가 파리기후협정에 따라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05년 대비 26~28% 감소하는 법안을 추진하자 이에 반발해 결국 입법에 제동을 걸었다. 보수파는 이슬람 난민 유입을 막기 위해 이민 관련법을 강화해야 한다며 턴불 총리를 압박하기도 했다. WSJ는 총리 축출이 자유당 내 온건파를 견제하기 위한 보수파의 ‘반역(rebellion)’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턴불 총리도 당내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전력이 있다. 애벗 총리는 2014년 호주인이 탑승한 말레이시아 항공 여객기 MH370편 실종과 MH17 편 추락에 이어 시드니 카페 인질극까지 등 이어진 악재에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당시 애벗 총리 불신임 요구에 선봉에 선 것이 턴불 당시 통신부 장관이다. 턴불 당시 장관은 정부가 경제와 관련해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이는 전적으로 애벗의 책임이라고 주장하며 자유당 의총을 소집해 결국 당 대표에 당선, 총리에 취임했다.
자유당의 라이벌인 노동당에서도 권력 다툼의 전력이 있다. WSJ는 오히려 노동당이 총리를 쫓아내는 나쁜 버릇을 정치권에 들여놨다고 꼬집는다. 2010년 대중적 인기가 있었던 케빈 러드 총리가 중동·동남아 난민 처리 문제와 광산세 부과로 잠시 삐걱거리던 사이 부총리였던 줄리아 길러드가 반(反) 러드 총리 계파와 손 잡고 의총을 소집해 총리직을 거머쥐었다. 이후 노동당은 계파 갈등에 시달리다 결국 2013년 러드 전 총리가 길러드 당시 총리를 쫓아내고 다시 총리직에 앉았다. 하지만 권력 갈등에 이골이 난 호주국민들은 차기 총선에서 자유·국민당 연립 정부에 표를 던진다.
양대 정당이 국민들의 신임을 잃으면서 의회는 파편화돼 재정 건전화·법인세 인하 등 주요 개혁 정책들이 입법 과정에서 잇따라 중단되고 있다. 현재 상원에서 자유·국민당의 의석은 과반에 못 미치는 31석이다. 노동당의 의석은 26석이고 나머지 19개 의석은 8개 야당과 무소속 1명이 나눠 점유하고 있다. 상원이 자유당 정부가 입안한 재정 확보 안을 부결시키자 세계 최고등급인 호주의 국가신용등급이 강등될 것이라는 목소리는 시장에서 잦아들지 않고 있다. 턴불 총리가 추진한 법인세 인하 법안도 결국 상원에서 무산됐다.
새 총리로 선출된 모리슨 장관은 협치를 중요시하는 성격으로, 급격한 우경화를 우려한 자유당 내 온건파의 지지에 힘입어 이날 결선 투표에서 경쟁자인 피터 더튼 전 내무장관을 제쳤다. 다만 턴불 총리 불신임을 추진했던 보수파 피터 더튼 전 내무장관도 모리슨 장관에게 불과 5표 뒤진 40표를 얻으며 세력을 톡톡히 과시한 만큼 당내 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갈지는 미지수다.
/변재현기자 humblenes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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