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판 유럽연합(EU)’을 목표로 창설된 남미국가연합(UNASUR)이 붕괴 위기에 몰렸다. 좌파의 선봉에 섰던 브라질·베네수엘라를 중심으로 뭉쳤던 12개국은 경제난으로 촉발된 핑크타이드(좌파물결) 퇴조와 함께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는 모습이다. 전문가들은 UNASUR이 회원국의 도미노 탈퇴로 결국 해체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28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이반 두케 마르케스 콜롬비아 대통령은 전날 UNASUR 탈퇴를 공식 선언했다. 두케 대통령은 “외교장관이 UNASUR에 제출한 탈퇴서가 6개월 후 발효될 것”이라며 “UNASUR은 그간 베네수엘라 독재의 공범처럼 행동해왔다”고 지적했다. 베네수엘라와 총 2,200㎞의 국경을 공유하는 콜롬비아가 베네수엘라에서 몰려드는 난민에 대한 대책을 거듭 요청했지만 UNASUR이 적당한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외신과 전문가들은 베네수엘라 사태는 표면적 이유일 뿐 콜롬비아가 탈퇴한 배경에는 남미대륙의 이념 변화가 있다고 지적한다. UNASUR이 창설된 지난 2008년은 핑크타이드가 정점에 달했던 시기다. 2000년대 초반 미국이 미주대륙을 하나의 시장으로 묶는 미주자유무역지대(FTAA)를 추진하며 콜롬비아 등 남미 우파 국가에 러브콜을 보내자 이에 위기를 느낀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당시 브라질 대통령과 고(故)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남미 통합’을 내걸어 UNASUR 창설을 추진했다. 당시 좌파 정권이었던 아르헨티나·에콰도르·칠레는 UNASUR에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2007~2008년 당시까지도 5~6%의 경제성장률을 달성했던 브라질과 경제협력을 강화하면 손해 볼 게 없다는 판단도 남미국가들의 구미를 당겼다. UNASUR은 설립 초기만 해도 남미 공용화폐 수크르, 남미시민권제 도입 등 EU와 닮은꼴 정책을 추진하며 대륙 통합을 이끌었다.
하지만 2014년 원자재 가격 하락과 포퓰리즘 정책의 실패로 브라질·베네수엘라가 경제난에 직면하면서 핑크타이드가 흔들리자 UNASUR도 위기에 봉착했다. 2015년 아르헨티나를 시작으로 2016년 페루와 브라질, 지난해 칠레에서 우파로 정권교체가 이뤄지며 회원국 간 갈등도 본격화됐다. 지난해 1월 에르네스토 삼페르 UNASUR 사무총장이 물러난 후 좌우파 국가들이 인선을 두고 대립하면서 사무총장직은 여전히 공석으로 남아 있다. 그 사이 UNASUR은 변변한 국제회의도 개최하지 못하는 식물기구가 됐다.
특히 창설을 주도했던 브라질과 베네수엘라의 정치·경제위기로 구심점이 사라지자 기구 와해에 속도가 붙고 있다. 브라질은 오는 10월 대선을 앞두고 부패 혐의로 구속된 룰라 전 대통령이 지지율 선두를 달리며 한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정치불안이 계속되고 있다. 브라질 연방대법원이 전날 룰라 전 대통령 석방 판결을 대선을 한 달 앞둔 9월 중에 내리겠다고 발표하자 이날 달러 대비 헤알화 가치는 전일 대비 1.36% 폭락한 4.1374헤알에 마감했다. 미국의 경제제재를 받는 베네수엘라는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국가 경제가 사실상 마비된 상태다.
우파가 집권한 남미국가들은 UNASUR이 그동안 미국의 대외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다는 점에서 이 기구와 거리를 두면 미국과의 경제협력을 강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눈치다. 군테 마히홀트 독일 국제·안보연구소 교수는 “남미국가들이 정치적 지역 협력보다 단순히 경제적 이익을 따졌을 때 성장이 더욱 수월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시작한 것”이라며 “(콜롬비아의 UNASUR 탈퇴는) 남미·미국 내 우파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콜롬비아의 공식 탈퇴가 다른 우파 집권국의 도미노 탈퇴로 이어질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콜롬비아를 포함해 아르헨티나 등 5개국은 4월 UNASUR 활동을 중단했으며 이후 탈퇴 문제를 협의하고 있다. 마히홀트 교수는 “UNASUR은 정치적 기반을 잃었으므로 끝났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변재현기자 humbleness@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