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소설가 로스 레키의 ‘카르타고 3부작’ 중 1995년 출간된 1권 ‘한니발’을 보면 카르타고의 명장은 로마 침공을 위해 알프스를 넘기 전 청동으로 만든 솥단지 200개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높은 사기를 유지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병사들이 언제 어디서든 배를 곯지 말아야 하고 그러려면 솥이 필요하다는 게 한니발의 설명이다. 먹는 것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한니발 덕분에 카르타고군은 로마를 멸망 직전의 위기로 몰고 갈 수 있었다. 비록 로마 정복에 실패하고 전쟁에서도 패했지만 그가 그토록 중요시했던 솥단지는 전후 로마군의 전투 필수품목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다.
솥은 동서고금을 막론해 소중하고 신성한 존재였다. 솥단지가 찼다는 것은 백성들이 굶주림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뜻하고 지배계층에게는 피지배계층으로부터 권력의 정당성을 인정받았다는 의미다. 중국 진시황이 하나라 우왕 때 만들어진 청동 솥 ‘구정(九鼎)’을 찾기 위해 사수(泗水)를 뒤진 것도 자신이 세운 나라의 정당성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수백명을 동원해 강바닥까지 샅샅이 훑었는데도 찾지 못했고 결국 진나라는 천하 통일을 한 지 불과 15년 뒤에 망하고 말았으니 ‘솥이 곧 민심이자 천심’이라는 게 허튼 말은 아닌 듯싶다.
솥단지를 얻는 것이 지배층의 정당성을 위한 것이라면 내던지는 행위는 힘없는 대중이 국가권력에 할 수 있는 최대의 항의 표시다. 2004년 11월2일 서울 여의도 한강시민공원에 3만여명의 외식업소 사장들이 모였다. 극심한 불황으로 생존을 위협받는 와중에 세금 부담까지 늘어나자 ‘생존권 사수’를 위해 몰려든 것이다. 집회 참가자 중 수백명은 식당 주방에 있던 솥을 들고 나와 공원 바닥에 내동댕이치기도 했다. 사상 유례가 없었던 ‘솥단지 시위’는 이렇게 등장했다.
최저임금 인상의 고통 탓에 서울 도심에서 또다시 솥단지들이 등장했다. 8,000명의 소상공인들이 29일 비를 맞아가며 서울 광화문광장에 모여 최저임금 제도 개선을 촉구했다. 한쪽에서는 14년 전처럼 솥을 던지는 퍼포먼스도 진행됐다. 이들 대부분이 노동시장에서 밀려나 어쩔 수 없이 자영업자가 된 사람들이다. 임대료에 등이 휘고 가맹비에 피가 마르며 최저임금에 고통받는 약자들이다. 내동댕이쳐진 솥단지 속에 담긴 이들의 눈물을 이제는 닦아줘야 하지 않을까. /송영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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