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학자금 부채가 잘나가는 미국 경제를 위협하는 새로운 시한폭탄이 되고 있다. 주 정부의 재정을 메우고 경쟁적으로 신입생을 유치하기 위한 호화시설을 짓느라 각 대학이 돈을 쏟아붓는 사이 살인적으로 치솟은 등록금은 미국 가계를 빚더미에 올려놓으며 경제성장의 근간을 해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과도한 학비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커지자 일부 대학들은 학비 면제 등 파격적 혜택을 내놓고 있지만 재원을 주로 기부금에 의존해 한계가 여전하다는 분석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미국 언론에 따르면 2·4분기 말 현재 미국 청년층이 떠안은 학자금 부채는 1조5,200억달러에 이른 것으로 집계됐다. 2012년 중반 1조달러를 돌파한 지 6년 만에 5,000억달러 이상 늘어난 것이다. 지난해 말 기준 13조달러를 넘어선 미국의 가계부채 가운데 학자금대출은 주택담보대출(약 8조9,000억달러)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비중을 차지했다.
미국 내 학자금 부채가 이처럼 급속도로 불어난 데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도화선이 됐다. 당시 경제위기로 고용이 줄자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일자리를 잡기 위해 학위를 따려는 수요가 급증했다. 대학을 가지 않아도 괜찮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기존 인식이 빠르게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 조지타운대 연구팀은 미국에서 고졸 학력으로 구할 수 있는 직업의 비중이 과거 44%에서 오는 2020년에는 36%로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대학문을 두드리는 청년층이 늘어나는 것과 때를 같이 해 대학 등록금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금융위기로 주 정부 등의 재정상황이 어려워져 주립대나 2년제 커뮤니티대에 대한 예산 지원이 줄어든 반면 각 대학이 신입생 유치를 위해 과도한 시설투자에 나선 탓이다. 오하이오의 한 대학은 경쟁 대학에 뒤처져 보이지 않기 위해 호화 기숙사는 물론 골프연습장과 암벽등반 시설 등을 갖춘 학생회관을 건설하느라 1억달러 넘게 투자해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다.
교육의 질과 상관없이 대학 순위평가에 영향을 주는 교수 등 교직원의 고액연봉도 등록금 인상으로 이어졌다. 일부 대학의 경우 행정직 직원들이 전체 교직원의 절반을 넘으며 대학 운영비 급등의 주범이 되고 있다고 USA투데이는 지적했다.
워싱턴DC의 사립 명문인 조지워싱턴대나 노스웨스턴대 등은 전국 대학 랭킹을 높이기 위해 작정하고 등록금을 올리기도 했다. ‘비싼 것이 명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한 것이다. 이들 대학은 고액 등록금을 받아 첨단 도서관과 번듯한 건물을 새로 지어 대학 순위를 올리고 이를 발판으로 재차 등록금을 인상했다. 뉴욕대 역시 맨해튼 한복판에서 공부한다는 환상을 학생과 학부모에게 심어주며 미국에서 가장 비싼 등록금을 정당화했다. 하버드·예일·프린스턴·컬럼비아 등 미 동부 명문 사립대들의 학비는 등록금에 기숙사비와 교재비를 합쳐 연간 7만달러 선을 훌쩍 넘어섰다.
대학 교육의 사치재 전략에 뛰어든 것은 사립대뿐이 아니다. UC버클리나 일리노이주립대 등 일부 공립대의 연간 총학비는 줄줄이 3만달러를 넘어섰고 유학생이나 다른 주에서 온 학생의 경우 4만~5만달러를 부담해야 한다. 아울러 하버드나 스탠퍼드·MIT 등 명문대로 기부금이 몰리면서 미국 전체 대학생(1,800만여명)의 40%가량이 다니는 커뮤니티대에 대한 지원이 줄어든 것도 평범한 학생들의 등록금 부담을 높이는 요인이 됐다. WSJ는 1990~2016년 미국 대학 등록금이 연평균 6%씩 올라 물가상승률의 2배를 넘었다고 전했다.
비싸진 등록금에 젊은이들의 부채는 급속도로 불어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대학 졸업생의 부채가 2011년 당시 1인당 2만5,000달러에서 최근에는 3만 500달러로 늘었다며 과거 10년 정도에 상환 가능하던 대출금 부담 기간이 훨씬 길어져 사회 초년생들의 생활 전반을 짓누른다고 지적했다. 실제 2003∼2004년 학자금 대출 상환을 시작한 사람 중 12년이 지나 빚을 다 갚은 사람은 20%에 그쳤다고 미 교육부는 밝혔다. 연방준비제도(Fed·연준)도 학자금 부채 때문에 결혼과 출산을 늦추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주택시장도 타격을 받고 있다고 최근 보고서에서 우려를 나타냈다. 미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 역시 “학자금대출은 졸업생에게만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미 경제 전반에 중대하고 장기적인 역풍이 되고 있다”며 시급히 재정대책 등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학비 부담으로 실력 있는 학생들도 대학 입학을 꺼리는 상황이 벌어지자 일부 대학들은 무상교육에 가까운 등록금 면제 프로그램을 내놓기 시작했다. 중부의 명문 일리노이주립대는 내년 신입생부터 가계소득이 6만1,000달러 이하인 주내 학생들의 수업료를 면제하기로 했고 학비가 비싸기로 유명한 뉴욕대 의대도 연간 5만5,000달러인 수업료를 무료로 한다고 최근 발표했다. 하지만 이들 대학은 재원을 고액 기부자들의 후원금에 기대는 처지여서 주 및 연방정부가 구조적 재정대책을 세우지 않는 한 일부 학생들에게만 혜택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다만 도널드 트럼프 정부는 최근 미 고등학교 졸업생 수 증가율 둔화에 비해 대학 수는 크게 늘어나고 등록금 인상률 또한 한풀 꺾여 학자금 부채 폭탄이 쉽사리 터지지는 않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경기호조로 일자리가 늘어나는 것도 부채 리스크를 상쇄하는 요인이다. /뉴욕=손철특파원 runiron@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