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인 오는 2019년을 앞두고 나라를 구하려 몸을 던졌거나 불의와 맞서 싸운 역사 속의 잊혀진 의인들을 발굴해 널리 알리는 연재를 서울경제신문과 동북아역사재단이 함께 시작합니다. 우선 일제하 독립운동을 해온 선열들을 살피고 정의의 물결에 동참한 일본인·중국인 이야기, 나아가 다른 시대의 의인들도 찾아 나설 예정입니다. 의인들의 숭고한 정신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의 좌표가 되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을 기대합니다.
만주 최후 독립군 사령관
소작농 출신으로 독립운동 투신
10년간 300차례 항일전투 이끌어
‘무학’ 불구 높은 인품과 결단력
부하·동포들에 절대적 신망 얻어
南선 74년 국립묘지에 가묘 조성 1934년 9월18일(화) 밤11시, 음력 8월10일로 풍요로운 명절 한가위를 나흘 앞둔 날이었다. 9월 하순으로 접어드는 남만주의 한밤은 제법 한기마저 느껴졌다. 보름달에 가까운 가을의 어슴푸레한 달빛이 앞사람을 비추고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남만주 환런현(桓仁縣) 샤오황거우(小荒溝)의 길게 자란 옥수수밭 사잇길을 앞장서 걷던 중국인 사내가 좁은 삼거리 길을 우측으로 돌아 앞장서다가 갑자기 권총을 뽑아들고 뒤돌아서면서 소리쳤다. “나는 과거의 왕밍판(王明藩)이 아니다, 목숨이 아깝거든 일본군에 항복하라!” 하지만 조국광복을 위해 반생을 용전분투하던 뒤 사내는 벽력같은 호령으로 후안무치한 왕가를 질타할 뿐이었다. 갑자기 수수밭에서 수십 발의 총성이 울렸다. 뒤따르던 사내는 가슴에 두 발을 맞고 쓰러졌다. 그를 수행하던 독립군 부하들이 옥수수밭을 향해 총을 쏘았지만 스산한 바람만 불어왔다. 사내는 고통으로 신음하다 하루 반이 지난 9월20일 오후1시6분에 영웅적 생애를 마감하고 말았다.
만주 최후의 독립군 사령관!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은 그렇게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본명은 양서봉(梁瑞鳳), 이름 그대로 상서로운 봉황이었다. 대부분 평안도에서 건너온 남만주의 한인 교민들은 그를 ‘세봉’이라 불렀다. 이때 나이는 불과 39세. 그는 1896년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태어났으나 1917년 남만주 싱징현(興京縣, 지금 신빈현)으로 이주해 농사를 지었다.
조선혁명군은 1929년부터 1938년 말까지 10여년간 매우 끈질기게 만주를 침략한 일본 침략세력을 상대로 싸웠던 만주 최후의 독자적 독립운동 조직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자랑스러운 독립군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한다. 1930년대 전반기 남만주에 존속했던 한인 교민 자치조직 국민부(國民府)는 사실상의 정부였으며 국민부와 조선혁명군을 이끌었던 조선혁명당은 핵심적 지도정당이자 여당 구실을 하는 삼위일체의 조직이었다. 조선혁명당은 ‘일본 제국주의를 박멸해 한국의 절대 독립을 이룬다’는 강령 아래 설립됐다.
1930년대 주로 남만주 지역에서 300여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독자적으로 혹은 중국의용군과 힘을 합쳐 치렀을 뿐만 아니라 수십 차례의 국내 진입작전을 전개해 식민지 통치당국을 놀라게 했다. 오죽하면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20여년의 오랜 기간 동안 조선의 독립을 꿈꾸며 용맹무쌍하게 활동한 치안의 암(癌)”이라고 표현했겠는가?
양세봉은 1932년 2월부터 1934년 9월 순국할 때까지, 이처럼 자랑스러운 조선혁명군의 사령관으로 활동하며 숱한 에피소드와 미담을 남긴 전설적 영웅으로 그 이름을 깊이 새겼다.
양세봉은 그를 따르는 독립군 장병과 동포들로부터 ‘군신(軍神)’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능한 사령관 및 철저한 동포의 보호자로서 신망을 얻었다. 조선혁명군 중대장을 지낸 계기화(桂基華)는 양세봉을 이렇게 회고했다.
“불세출의 백전백승의 군신으로서…그 침착하고 굳센 결단성과 인자하고 자상하신 부모 같으신 성품, 아무리 성날 일 저질렀어도 부하에게 욕하는 일이 없으시고, 큰일을 저지른 자는 꼭 자기 곁에 있게 하여 다른 상급자가 구타하지 못하게 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나 중국 군관학교 혹은 유명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군 사령관이나 지휘관으로 활약한 인물은 많았다. 그러나 만주(중국 동북지방)에 이주해 소작농으로 어렵게 생활하다가 직접 독립운동에 투신해 독립군 사령관까지 지낸 인물은 양세봉이 유일했다. 특히 그는 정규학력이 없는 무학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국내 유일 남북 국립묘지 안장
일제 간계 빠져 39세때 암살당해
사후에 목 잘리는 수모 겪기도
1986년 평양 애국열사릉에 이장
南선 74년 국립묘지에 가묘 조성
이렇게 부하들은 물론 한인 교민 등 민중에게 절대적 신임과 존경을 받았던 양세봉! 이 때문에 일제 당국은 그를 암살할 흉계를 꾸몄다. 이 특별공작은 평북 강계 출신의 밀정 박창해(朴昌海)가 주도했다. 그는 양세봉을 잘 알고 조선혁명군을 도왔던 중국인 왕밍판을 매수해 양세봉을 제거하려 했다. 왕밍판은 일본군과 괴뢰 만주국(1932년 3월~1945년 8월) 당국의 거센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던 양세봉과 조선혁명군 참모들에게 ‘한중 합작’을 협의하러 가자며 양세봉 등을 샤오황거우 골짜기로 유인해 결국 암살하고 말았던 것이다.
독립군 장병과 동포들의 애도 속에 부근의 고구려 흑구(黑溝)산성 아래에 묻혔던 양세봉의 시신은 일본군에 의해 다시 목이 잘리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의 유해는 1961년 평양 부근으로 옮겨졌다가 북한 당국의 주선으로 1986년 9월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이장됐다. 한편 대한민국은 1962년 양세봉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는데 1974년 서울의 국립묘지(현재 국립현충원)에 가묘를 조성했다.
아마도 양세봉은 남북 양쪽의 국립묘지에 모셔진 거의 유일한 독립운동가일 것이다. 김일성은 1992년 간행한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에서 무려 24쪽에 달하는 많은 분량을 할애해 ‘량세봉 사령’과 얽힌 사연을 이야기했다.
영하 20∼30도를 오르내리는 만주의 혹독한 겨울철을 이겨내며 양세봉과 함께 항일투쟁을 벌였던 계기화는 그 어려움과 한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전한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고산준령에서 산짐승과 더불어, 봄을 맞은 이 기아와 영양실조에 걸린 움직이는 해골들은 전원 손발에 동상이 걸렸다. 아래로는 압록강의 성스런 물(聖水)이 흐르고 눈앞에 손에 잡힐 듯 조국의 산봉우리들이 손짓하는 듯이 보이건만, 다 원수의 말발굽에 짓눌려 죽은 듯하다. 아~ 누구를 위한 속죄양이냐, 동포는 아는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양세봉이 이끈 조선혁명군 독립군처럼 한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10년이나 무장투쟁을 벌인 조직은 없었다.
1995년 8월 광복 50주년에 조선족 동포들과 국내외 유지들의 성원으로 신빈현 왕칭먼(旺淸門) 조선족 소학교 구내에 높이 5.4m에 달하는 양세봉 장군의 석상이 세워졌다. 하지만 조선족 동포들이 급감해 이 학교가 폐교되면서 이 훌륭한 석상은 2009년 9월 말 왕칭먼 강남촌, 사람들의 왕래가 드문 산골짜기로 옮겨졌다. 이제 이 석상마저 옮겨진 지 9년이 흐르면서 곳곳이 부서지면서 풍화되고 있다.
2019년은 3·1운동이 거족적으로 전개되고, 그 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진 지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정부와 국민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하지만 수십만 동포가 거주하면서 본격적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던 만주 독립운동의 현장은 철저히 소외되고 잊히고 있다. 이미 중국 남부지방에 4개나 있는 임시정부 기념관에 더해 서울에 임시정부 기념관 건립이 추진되고 있지만 사실상 독립운동의 주무대인 중국 동북지방에는 이를 기념하고 알리는 공식적인 기념관은 없는 실정이다.
오죽하면 중국인 학자 차오원치(曹文奇) 선생이 “한국 정부가 총칼 한번 안 잡아본 정치인에게는 일등공훈(대한민국장)을 주면서 평생 총칼 들고 만주에서 싸운 양세봉 장군에게 3등훈장(독립장)을 수여한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겠는가.
차별받던 서북지방 출신의 빈농 이주민 젊은이가 아무런 사심 없이 자신과 가족을 희생하며 애국애족을 실천하면서 독립과 혁명, 반봉건 근대화 운동에 투신한 사실은 안일을 추구하며 현실을 살아가기에 급급한 우리에게 깊은 공명과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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