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만 아니면 괜찮은 사람인데 취하면 어쩜 그렇게 돌변하는지…”
서울 강서구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만난 50대 후반의 중년 여성 김모씨는 2년 전부터 남편의 ‘주폭(酒暴)’에 시달렸다. 경찰은 법원에서 가해자가 접근하거나 연락하는 것을 금지하는 임시보호명령을 받아냈지만 김씨는 지난달 돌연 남편과 함께 법원에 출석해 보호처분을 취소했다. 폭염에 달리 있을 곳도 없는 사람이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용서를 구해 마음이 약해졌다는 게 이유였다. 김씨는 “아들과 며느리 보기가 부끄럽다”며 이번 추석에도 술만 마시면 재발하는 남편의 난동과 손찌검 때문에 벌써부터 걱정이 태산이다.
추석 연휴를 이틀 앞둔 20일. 가정폭력이 재발할 우려가 높은 ‘위기가정’을 돌며 상황을 점검한 서울 강서경찰서의 한진욱 학대방지경찰관(APO)은 “명절이 위기가정에 ‘싸울 거리’를 제공해 기름을 부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신고 접수 빈도 등 심각도에 따라 A(위험), B(우려) 두 개 등급으로 관리되는 강서서 관내 위기가정은 약 120곳.
2인 2개 조로 구성된 APO는 명절을 앞두고 위기가정을 점검하느라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APO들은 “보통 끝을 봤으면 서로 안 보는 게 정상인데 김씨처럼 자녀로 묶인 가족은 하루아침에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입장을 바꾼다”면서 “‘술만 안 마시면 괜찮다’는 말을 들을 때는 힘이 쭉 빠진다”고 안타까운 심정을 전했다.
명절은 APO에게 ‘대목’이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친인척들이 한데 모여 즐거운 한때를 보내지만 가정 내 갈등이 고조돼 폭력으로 번지는 경우도 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찰청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최근 3년간 명절기간 가정폭력 신고 접수는 하루 평균 약 1,018건으로 평소(690건)보다 무려 47.5% 많았다.
발생 건수도 늘어나는 추세다. 최근 3년 설·추석 연휴 기간 가정폭력 신고는 2015년 8,491건(9일)에서 2016년 10,622건(10일)으로 늘었고 지난해에는 1만4,436건(14일)에 달했다. 연휴 기간이 길어진 것과 함께 가정폭력 범죄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면서 신고가 늘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 때문에 APO들은 명절 전후로 위기가정들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평소보다 높은 주의를 기울인다.
경찰은 연휴가 시작되기 전에 전체 위기가정에 대한 현장방문 또는 전화 모니터링을 실시한다. 위기가정에서 신고가 접수되면 보호처분 신청 이력, 입건 기록 등 112 시스템에 사전 수집된 정보에 따라 신속한 대응이 가능해진다. 평소 위기가정에 대한 모니터링이 중요한 이유다. 경찰청의 한 관계자는 “명절 전후 가정폭력 범죄 예방을 위해 위기가정을 관리함은 물론이고 현장대응도 강화하고 있다”며 “추석 연휴 기간에 사건이 발생하면 APO의 정보를 지역 경찰과 수사팀에 전달해 대응하고 피해 발생 여부를 면밀히 확인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지현기자 ohjh@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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