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평양공동선언’은 짐작은 했지만 막상 발표되니 놀랍기 그지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북한 비핵화나 동맹보다 남북관계를 중시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는 있지만 이제 김정은과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이를 공식화했다. 일반 국민들은 깊은 의미를 모를 수도 있으나 우리의 미래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다줄 대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동안 우리의 평화와 번영을 뒷받침해온 한미동맹과 자강(自强) 안보태세를 남북공조, 즉 ‘우리 민족끼리’가 대체하게 된 것이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핵심이자 가장 우려되는 것은 북 비핵화의 실질적 진전이 없는데도 비핵화보다 훨씬 중요한 우리 국방태세를 허무는 결정적 조치에 합의한 점이다. 비핵화는 미북 중재자를 자처했으니 애초에 관심과 노력이 없었고 경협도 국제제재로 어려우니 군사 분야의 대폭적 양보를 정상회담 선물로 가지고 간 것이다. 돈을 줄 형편이 못 되니 신체포기각서에 서명하고 온 셈이다.
9월24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차 미북정상회담을 열겠다고 밝혔고 회담 후 종전선언을 하게 되면 ‘우리 민족끼리’ 앞에는 별다른 장애가 없을 것이다. 미국 내 전문가들도 대체로 제재 해제에는 부정적이나 영변 핵 폐기와 종전선언을 교환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문 대통령은 주한미군이나 유엔사와 상관없는 정치적 선언이라고 강변하며 미국을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있다.
평화협정에 포함된 내용 중 종전선언만 분리해 북 비핵화 전에 추진한다는 구상은 노무현 정부 때 시작했다가 중단됐다. 문재인 정부 때 살아난 이 구상은 반대하던 미국이 사실상 수용하고 소극적이던 북한이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급물살을 타고 있다. 북한이 적극적으로 나온 것은 대(對)미중 전략의 일환일 수도 있지만 우리 정부가 국방태세를 약화시키면서까지 남북관계에 매달리는 것을 봤기 때문일 것이다. 종전선언만 되면 이를 근거로 북한이 이루고 싶은 것을 우리 정부가 알아서 다 해줄 것으로 믿기 충분하다.
북한 역시 종전선언은 정치적 선언일 뿐이라고 강변하고 있으나 실익도 없는데 매달릴 까닭이 없다. 지금의 분위기라면 북한은 종전선언으로 핵 폐기는 하지 않으면서 평화협정 등 원하는 것은 다 얻을 수도 있다. 먼저 종전선언으로 북핵과 관련한 어젠다와 관심이 비핵화에서 종전·평화 등으로 전환해 핵무장을 기정사실화할 수 있다.
또 지난 6월 미북정상회담 후 중단된 한미 연합훈련과 미 전략자산 배치를 영구 중단시킬 수 있는 길이 열리고 북한이 가장 부담스러워 하는 미국의 군사적 옵션을 통한 비핵화 명분을 없앨 수 있게 된다. 평화 무드를 대세로 만들어 대북제재 해제 여론을 미국과 국제사회에 유리하게 형성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문 대통령의 ‘남북관계 우선주의’와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가 잘못된 만남을 하면 북한의 입장에서 종전선언은 평화협정의 촉진제가 됨과 아울러 평화협정의 조치를 외상으로 먼저 끌어다 쓰는 절묘한 신용카드가 될 수 있다. 이번 평양선언과 군사 합의에는 연합훈련 중지, 전략자산 배치 금지, 재래식 군사위협 중지 등 매우 포괄적 조치들이 담겨 있어 북한이 사실상의 종전선언을 외상으로 앞당겨 얻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따라서 공식적으로 종전선언이 되면 평화협정 내용이 뒤이어 실행될 것이고 비핵화 마지막 단계에서 체결돼야 할 평화협정은 이미 단행된 조치를 확인하는 문서에 불과할 수 있다. 그때는 북한 입장에서 있으나 마나 한 평화협정 서명을 위해 비핵화 리스크를 감당할 하등의 이유가 없어지게 된다.
유엔사와 한미동맹은 6·25전쟁 때문에 생겼다. 탄생 원인이 없어졌으니 논리적으로 보면 존재 이유가 없다. 북한이나 우리 정부가 가만히 있어도 1980년대에 반전·반핵·반미 구호 아래 결국 미 전술핵무기 철수 분위기를 만들었듯이 우리 좌익·반미 세력이 총궐기해 유엔사 해체와 주한미군 철수를 관철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 국방과 더불어 동맹마저 해체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중국 견제 때문에 미국이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일방적 소망일 뿐이다. 한국이 남북공조를 안보의 대체재로 삼겠다는데 미국이 홀로 한국을 지킬 수 있을까. 떠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미동맹과 튼튼한 자주 국방대신 북한의 동포애만 믿고 맞을 미래를 우리와 후손들이 감당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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