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 화살머리고지 = 권홍우기자] 평온했다. 남북 평화 분위기 때문일까. 평소 같으면 긴장에 휩싸이는 최전방 일반전초(GOP)의 분위기가 여느 때와 다르게 느껴졌다. 서울 용산 국방부를 떠나 철원 평야를 거쳐 이 곳 GOP 도착까지 걸린 시간은 두 시간 남짓. 지척 거리의 분단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분단 현장의 가을 하늘은 남북의 군사적 화해의 역사적 첫 단계를 환영하는 듯 높고 맑았다. 비무장지대(DMZ) 내 남북 공동유해발굴(내년 4월)을 위한 전 단계로 지뢰를 제거하고 도로를 연결하는 작업이 본격 시작된 2일, 육군의 신형전술차량에 몸을 싣고 DMZ 안으로 들어섰다. 유엔사 소속 미군과 뉴질랜드 장교도 현장에 나와 기자단의 DMZ 출입절차를 지켜봤다. 방탄 헬멧과 방탄조끼의 무게감이 느껴질 무렵 도착한 화살머리고지 정상에서는 철원 일대가 다 시야에 들어왔다. 오른쪽 멀리 백마고지까지 보였다. 오른쪽 능선 아래 넓게 펼쳐진 지역의 이름은 대마리(大馬里). 후고구려·태봉국의 군주 궁예가 기병들을 훈련했던 드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우리 군의 감시초소(GP)가 위치한 이곳은, 해발고도 280여m 정도인 낮은 구릉이지만 6.25 전쟁의 격전지로 손꼽히는 지역. 국군과 미군, 프랑스군과 북한군, 중공군이 교대로 싸웠다. 휴전협정 직전 국군과 중공군의 전투에서만 아군 180여명, 중공군 1,300명 이상이 전사할 만큼 양보 없는 격전을 치른 이유는 전략적 요충이었기 때문. 누적된 전투에서는 한국군 200명, 미국과 프랑스 등 유엔군 300여명, 북한군과 중공군 2.000명 이상이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누가 확보하느냐에 따라 경기 북부의 곡창지대인 철원 평야를 장악할 수 있는데다 점령 당할 경우 수도 서울의 외곽 방어선이 전곡·동두천 라인까지 밀려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죽음으로 고지를 지켜냈다.
남북 양측이 내년 4월부터 본격 시작될 공동유해발굴작업을 실시할 지역으로 화살머리고지 일대를 선정한 이유도 이 같은 상징성을 갖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몇몇 고지를 제외하고는 평야 지대가 많아 작업이 상대적으로 용이하다는 점도 시범사업 지역으로 선정된 이유의 하나다. 우리 군은 연말까지 화살머리고지 GP 인근 2개 지역에서 이미 확보된 폭 2~3m 수색로를 10m 이상으로 넓힐 계획이다. 북한도 동일한 작업을 실시, 비록 DMZ에 국한되지만 내년 4월 남북 도로 연결을 앞두고 있다. 군사분계선(MDL)에 유해발굴 공동사무소 설치도 예상된다.
역사적인 남북 군사협력을 준비하는 군이 가장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은 안전. 병력 약 130여명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두고 장비 위주의 작업에 나설 계획이다. 해당 부대 지휘관은 “지뢰 매설 기록이 없지만 대인·대전차 지뢰는 물론 수류탄, 박격포탄 등 많은 불발탄이 산재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새로운 통로를 개척하는 게 아니라 기존 통로를 넓히는 작업이어서 상대적으로 위험도 낮다고 해도 장병들의 안전이 최우선”이라고 말했다. 그는 “병력의 약 40%가 경험이 풍부한 간부로 구성됐다”고 덧붙였다.
분단 이래 73년 만에 남과 북의 첫 군사협력을 위한 준비에 나서는 군을 뒤로 하고 돌아오는 길에 추수를 이미 마친 철원평야가 시야에 들어왔다. 평화롭다는 상념 속에 한 가지 단상이 문득 스치고 지나갔다. 북의 땅도 이처럼 평화로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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