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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언어정담] 봄 여름 가을 겨울, 자연의 언어를 속삭이다

작가

꽃·매미·단풍·눈…'계절의 소리'

인간의 언어보다 간결하고 정확

시인의 자연예찬 감상하노라면

눈부신 아름다움에 감사하게 돼





요즘처럼 파란 하늘이 자주 보이는 날들은 그저 창밖을 바라보는 일만으로도 커다란 기쁨을 준다. 가을하늘이 다른 계절의 하늘에 비해 좀 더 높고 청명해 보이는 것은 ‘이제 드디어 무더운 여름이 갔다’라는 안도감 때문에 더욱 반가운 계절의 신호탄으로 다가온다. 봄이 오는 소리는 꽃들이 전하고, 여름이 오는 소리는 매미가 전하며, 겨울이 오는 소리는 첫눈이 전하지만, 가을이 오는 소리는 다른 계절에 비해 조금 더 복잡하다. 귀뚜라미가 울기 시작해서 가을인가 하면 낮에는 아직 더울 때가 있고, 플라타너스 잎사귀가 갈색으로 변해 하나둘씩 바람에 흩날리기 시작해도 낮에는 여전히 반팔티셔츠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여름과 가을의 미묘한 샅바 싸움이 끝나고 나면, 비로소 ‘단풍’이라는 선연한 가을의 징후가 온 산하를 물들인다. 언어라는 복잡한 도구를 가지고도 자꾸만 정확한 의사표현에 실패하는 인간과 달리, 자연의 언어는 더욱 간결하면서도 정확하다.

지구 온난화와 이상기후에 관련된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는 사계절 중에서도 내가 가장 편애하는 ‘우리 지구의 이 아름다운 가을’을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한다. 여름과 겨울은 점점 길고 혹독해지고, 봄은 아무리 짧아도 아름다운 꽃들의 향연을 분명히 볼 수 있는 반면, 이토록 짧아진 가을은 정말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계절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푸르른 가을 하늘이 ‘뭐하는 거야, 책상에만 앉아 있지 말고 나를 좀 바라봐’라고 속삭이는 듯한 가을날. 그 가을하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복잡한 마음의 갈등과 요동치는 인간사의 괴로움이 사그라진다. 가을하늘, 그 해맑은 푸르름의 거울에 비춰보면 모든 슬픔이 용서될 것만 같다. 하루라도 더 이 완벽한 가을하늘을 바라보는 축복을 누리기 위해, 아파하고 있는 지구를 구할 수 있는 작은 일상의 실천을 하게 된다. 플라스틱 용기를 줄이고, 빨대를 쓰지 않고, 일회용품을 쓰지 않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점점 불규칙해지는 계절의 언어로 아픔을 표현하는 자연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위로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함민복 시인의 ‘가을’이라는 짧은 시는 이 아름다운 계절, 자연의 언어가 부르는 그 수많은 세레나데에 제대로 응답하는 인간의 우아한 추임새다.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이 단 한 줄의 시는 단풍이 붉게 물들고 은행잎이 샛노란 미소를 띄우고 플라타너스가 떨어지는 온갖 가을의 화려한 오케스트라를 향해 오직 단 한 줄의 ‘언어의 악보’로 짧고 굵게 가을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이 시는 가을에 가장 어울리는 감정, ‘그리움’을 단 한 줄의 문장으로 압축하여 읽는 이의 가슴을 두방망이질 치게 한다. 당신 생각을 등불처럼 켜놓은 채 잠이 드는 가을밤, 그리운 사람이 오늘따라 더 많이 그리워지는 가을밤, 그리운 마음을 벽돌로 빚을 수만 있다면 하룻밤 안에 바벨탑이라도 쌓아올릴 수 있을 것만 같은 애틋함. 그 모든 다채로운 그리움의 빛깔이 저 한 줄의 간결한 문장 속에 마치 밤송이 안에 든 밤톨처럼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다.

정희선 시인의 ‘가을날’은 가을이 지닌 ‘머지않아 사라질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의 정서를 아름답게 노래한다. “길가의 코스모스를 보고/가슴이 철렁했다/나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선득하니, 바람에 흔들리는/코스모스 그림자가 한층 길어졌다” 이 시를 읽고 있으면 아직 내 마음 속에서는 가을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활짝 핀 코스모스를 마주했을 때의 당혹감이 느껴진다. 코스모스를 바라볼 때 느끼는 감정은 벚꽃이나 철쭉 같은 봄꽃을 바라볼 때 느끼는 감정과 판이하게 다르다. 코스모스가 피어나는 가을은 필연적으로 어떤 스러짐을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코스모스가 핀다는 것은 이제 365일 중 4분의 1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못 견디게 아름답다’는 감정을 느끼게도 한다. 아름답지만 너무도 슬픈 것, 하지만 슬픔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아름다운 것에 대한 눈부신 깨달음이다. 이렇듯 시인의 언어는 계절이라는 자연의 가장 민감한 신호를 아름답게 포착하는 내면의 안테나가 되어준다. 이 가을, 시인의 언어와 자연의 언어가 함께 빚어내는 합창의 멜로디를 들으며 나는 ‘지금 여기, 아직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을’의 아름다움에 감사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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