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한화 계열사들이 현대오일뱅크에 거액의 손해배상금을 물어주게 됐다. 대법원이 재상고심에서 현대오일뱅크가 옛 한화에너지(인천정유로 상호 변경 후 SK(034730)에너지에 합병)를 인수할 때 계약한 대로 한화 측이 기존 담합행위에 따른 손해를 모두 배상해야 한다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12일 현대오일뱅크가 김 회장과 한화케미칼(009830)·한화개발·동일석유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원고 완전승소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에 돌려보냈다.
현대오일뱅크와 한화그룹 간 소송전은 외환위기를 겪었던 지난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김 회장과 한화그룹은 기업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한화에너지 주식 946만주를 현대오일뱅크에 매각했다. 당시 지분 인수계약을 체결하면서 한화 측은 ‘한화에너지가 행정법규를 위반한 전력이 없으며 이것이 거짓일 경우 500억원 내로 배상할 것’이라는 보증조항을 걸었다.
문제는 한화에너지가 1998~2000년 SK·LG칼텍스(현 GS칼텍스)·에쓰오일 등과 함께 군용 유류 입찰 과정에서 담합한 사실이 밝혀지며 불거졌다. 당시 인천정유로 상호를 바꾼 한화에너지는 2000년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475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국가도 담합행위로 손해를 봤다며 한화에너지를 비롯한 정유사들에 1,584억원의 배상을 청구했다. 한화에너지는 이뿐 아니라 공정거래법 위반으로 2001년 벌금 2억원의 약식명령을 받기도 했다. 이에 현대오일뱅크는 김 회장과 한화 계열사들이 보증 내용을 어겼다며 2002년 322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공정위를 상대로 한 과징금 취소소송과 국가가 제기한 소송 결과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치러진 1심은 청구액 가운데 변호사 비용과 벌금 2억원 등 총 8억2,730만원만 인정했다. 반면 2심은 “현대오일뱅크가 한화에너지의 담합 사실을 인수 전에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방치했다”며 배상할 필요가 없다고 결론을 냈다. 그러나 대법원은 “현대오일뱅크에 악의가 있었는지와 무관하게 손해를 배상하기로 한 것은 당사자들의 의사”라며 원심을 파기했다. 기업들이 계약 당시 손해배상 책임의 법적 성격과 배상액 산정 방법에 대해 합의했다면 이 합의가 신의성실 원칙보다 존중돼야 한다는 결정이었다.
이후 두 번째 2심에서는 “손해액을 입증하기 어렵다”며 배상금을 10억원으로 산정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날 두 번째 상고심에서 파기환송심 결과에 승복하지 않은 현대오일뱅크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은 “당사자들이 손해배상 범위와 금액을 산정하는 방법을 약정한 경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에 따라야 한다”고 설명했다.
/윤경환기자 ykh22@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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