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을 순방 중인 문 대통령은 18일 교황 공식 집무실인 교황궁(사도궁)에서 프란치스코 교황과 통역만 대동한 채 단독면담을 했다. 교황과의 면담 내용은 비공계가 관례이나 청와대는 바티칸과 사전 협의를 거쳐 면담 주요 내용을 공개하기로 했다.
문 대통령은 교황에게 “대한민국 대통령이자 개인적으로는 ‘티모테오’라는 세례명을 가진 가톨릭 신자로서 존경하는 교황을 직접 뵙게 돼 큰 영광”이라는 인사를 전했다. 문 대통령은 이어 “지난달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 위원장에게 ‘교황께서 한반도 평화와 번영에 관심이 많다’며 교황을 만나뵐 것을 제안했고 김 위원장은 바로 그 자리에서 ‘교황님이 평양을 방문하시면 열렬히 환영하겠다’는 적극적 환대의사를 밝혔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이 초청장을 보내도 좋겠느냐”고 묻자 교황은 “문 대통령께서 전한 말씀으로도 충분하나, 공식 초청장을 보내주면 좋겠다”며 “초청장이 오면 무조건 응답을 줄 것이고 나는 갈 수 있다”고 말했다. 교황은 그러면서 “한반도에서 평화프로세스를 추진 중인 한국 정부의 노력을 강력히 지지한다”며 “멈추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전했다.
교황의 방북이 실제 성사된다면 시기는 내년 교황의 ‘동아시아 순방’과 겹칠 가능성이 크다. 교황은 내년 일본을 방문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 바 있으며 중국도 16일(현지시간) 교황의 중국 초청 의사를 전달한 상태다.
교황이 이날 긍정적인 메시지를 내놓은 것은 ‘평화와 선교’라는 해외방문 기준에 북한이 부합하고 몸을 사리지 않고 갈등을 해결하는 교황의 스타일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교황은 그동안 한반도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왔다. 교황은 2013년 즉위 이래 아시아 최초 순방지로 한국을 택해 2014년 8월14일부터 4박 5일간 우리나라를 찾았다. 또 평창올림픽, 4·27 남북정상회담, 6·12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때마다 성공을 기원하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교황의 북한 방문이 성사되면 그 자체로 역사적인 사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교황 방북을 추진한 적이 있으나 실제로 성사되지는 않았다. 북한은 소련 해체로 고립 위치에 처한 1991년 교황 초청을 위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지만 북한 내 천주교 열풍이 불 것을 우려해 출범 두 달 만에 해산했다. 이는 태영호 전 주영국 북한공사가 저서 ‘3층 서기실의 암호’에서 밝힌 내용이다. 또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교황 초청 의사를 밝혔으나 불발됐다.
교황의 방북은 북한의 비핵화에도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북미 2차 정상회담이 미국 중간선거 이후로 미뤄지고 실무협의도 난항을 겪고 있다. 선거 결과에 따라 미국의 대북정책 기조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가톨릭교 수장이자 검소하고 소탈한 이미지로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교황의 방북은 국제사회에 북한에 대한 우호적 여론을 조성할 수 있고 이것이 다시 미국을 움직이는 동력이 될 수 있다. 실제 교황은 미국과 쿠바 수교, 콜롬비아 내전 종식 등에 결정적인 역할을 보여줬다 .
북한으로서도 정상국가 이미지를 대내외에 천명하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 한국·미국 등과 잇따른 정상회담에 이어 리설주 여사와의 동반외교 등으로 ‘은둔의 왕국’ 이미지를 벗고 있는 북한이 교황까지 맞아들인다면 전 세계에 변화의 진정성을 각인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다만 김 위원장이 초청장을 바로 보낼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다. 북한 같은 정치 구조에서 1인 지도체제가 흔들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바티칸시티=윤홍우기자 이태규기자 seoulbird@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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