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의 시대가 끝나고 자유민주주의가 ‘사상 경쟁’에서 승리하면서 대부분의 문명국가에서 독재의 폭압은 사라졌다. 웬만한 나라에선 정부를 비판한 지식인이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지도 않고 군인이 집회에 참가한 시민을 총살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 파시즘의 어두운 그림자는 싹 걷히고 진정한 민주주의가 구현됐다고 봐도 되는 것일까.
버트럼 그로스(1912~1997)가 지은 ‘친절한 파시즘’은 이러한 질문에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미국의 정치학자이자 행정가로 수많은 저술을 남겼던 그로스는 이 책의 초판을 지난 1980년 출간했다. 이후 세월이 흘러 2016년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자 새로운 위협이 도래할 미래를 정확히 예견한 분석으로 재조명되면서 국내에도 번역·출간됐다.
실제로 책장을 넘겨보면 약 40년 전에 쓰인 책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흥미로운 통찰로 가득하다. 저자는 1·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에 나타난 이탈리아·독일·일본의 파시즘과 달리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거대 자본과 정부가 결탁해 은밀하고 교묘하게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박탈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친절한 파시즘’은 야만적인 폭력을 동반하는 대신 신사적인 모습으로 작동하면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야금야금 갉아먹는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특히 현대 사회의 여론 조작 행태를 꼬집는 대목은 ‘댓글 조작’을 통해 시민의 눈과 귀를 막으려 했던 정부를 경험했던 우리에게도 섬뜩한 기시감을 안긴다.
책은 이러한 새로운 권력 형태에 대응하기 위한 해법은 결국 ‘시민운동’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환경과 여성 문제, 성(性) 소수자의 인권 등 현안을 넘나들며 시민들이 연대하고 권력을 감시할 때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장에서, 농장에서, 사무실에서, (중략) 우리는 그들에게 맞서 싸워야 한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폭력과 전쟁이 아닌 모든 방식을 동원해 그렇게 해야 한다.” 3만2,000원 /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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