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시간이었고, 최악의 시간이었다. 지혜의 시대였고,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였고, 불신의 세기였다. (…) 우리 앞에 모든 것이 있었고, 우리 앞에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으로 가고 있었고, 모두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의 도입부가 다시 회자되고 있다.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유럽 사회를 통찰한 명문장인데 오늘날의 한반도 상황과도 절묘하게 통한다는 점에서다. 분단 70년의 세월을 넘어 항구적 평화의 새 시대를 간절히 지향하지만 가보지 않은 길 앞에서 믿음과 경계, 기대와 회의가 교차하며 자꾸만 불안을 생산해내는 지금 이 순간과 딱 닮아서다.
소설의 제목마저 서늘한 울림을 준다. 현재 우리의 이야기 역시 두 도시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서울과 워싱턴에서 말이다. 그리고 요즘 두 도시 사이의 분위기는 사뭇 불안하다. 북한이라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에 대한 분석도 전망도 모두 다른 탓이다.
물론 서울과 워싱턴의 최정상에서 ‘공식적으로’ 표출되는 목소리의 결은 비슷하다. 공조·조율·협의·일치 등과 같은 단단한 단어들이 수시로 전면에 내세워진다. 하지만 오가는 이야기에 살을 붙여 플롯을 탄탄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저변의 목소리는 다르다. 온도 차가 확연히 느껴진다. 워싱턴은 서울이 조급하다고 하고 서울은 워싱턴이 회의감에 사로잡혀 있다고 한다. 이러한 온도 차는 결국 또 다른 불편한 감정을 낳는다. 다시 ‘네버 엔딩 스토리’가 돼버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말이다.
이야기가 이토록 어렵게 전개되는 까닭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한반도 평화가 단순히 지역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 북미 사이에 불신이 겹겹이 쌓여 있다는 점 모두 이유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서울과 워싱턴, 두 도시의 관계에만 집중해 보자면 양자 간의 입장 차를 서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 이유일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 민족은 함께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5,000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 살았습니다”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 연설이 이곳 서울에서는 큰 감동이었지만 워싱턴에서 볼 때는 그저 또 하나의 남북 이벤트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감동의 여운을 동력으로 삼아 남북관계에 속도를 내는 것을 워싱턴은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들에게는 한반도의 민족적 감성과 명운보다 냉정한 상호 법적 절차 마련과 합의, 이행 같은 이성적 요소가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비핵화 논의가 그들에게는 단순히 북미 간 양자 협상이나 한반도 해법 마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 그리고 앞으로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중대한 표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가본 적 없는 이 길의 끝에 새 시대로 통하는 문이 존재하며 그 문이 마침내 평화롭게 열리기를 바라는 마음은 두 도시 모두 같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간절함의 깊이는 결코 같을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이 불안한 살얼음판 위에서 누가 더 신중해야 할까. /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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